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치다 타츠루는 한자로 內田 樹. 이름이 나무다. 나무 공부를 할 때,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타츠루가 지닌 통찰의 도움을 받았다. 나온 직후인 20195월에 만나서 나무, , 돌꽃(지의류), 곰팡이(균류), (조류),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를 공부하는 내내 무엇에 끌린 듯 이 책을 거듭거듭 뒤적거렸다. 몸 감각에 귀의하기, 인간 언어로는 불가능한 존재들과 소통하기 같은 관건적 주제가 이 책과 내 공부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까닭을 넘어서 저자가 빚은 여러 통찰을 하나로 묶는 사유 기축이 내 주의를 끈다. 그 기축을 표현하는 데 명확한 범주적 용어를 쓰지 않고 그때그때 변주를 하기 때문에 그의 강의 스타일처럼 분방하지만, 어떤 큰 표지나 이미지가 존재한다. 고수에 해당하는 합기도 무예인이자 프랑스철학 전문 연구자로서 특질이 저자 사상에 삼투해 있음을 생각하면 자못 흥미진진해진다. 내 생각과 사뭇 다르기도 한 점 또한 매혹이다.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근질거린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과 프랑스철학을 공부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합기도는 필연으로, 은총으로 매개자 구실을 한다. 잘 모르지만 일본어는 그리 명석한 언어가 아니다. 반대로 명석하지 않으면 프랑스어가 아니다.” 그 간극을 무예인 몸 감각으로 채우는 데서 저자만 지닌 탁월함이 배어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예 아닌 침과 수기로 타자 몸에 가닿는다. 행위 본성을 따지면 둘은 같다. 행위 의념을 따지면 둘은 다르다. 이 일치와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과문 탓에 내가 느지막이 발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저자는 관심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100권이 넘는 저서 가운데 거의 30권에 달하는 책이 번역되어 있을 정도다. 정치적인 면으로 보면 그는 스스로는 리버럴이라 칭하지만 일본 안에서 극우한테 끊임없이 살해 협박을 받는다고 한다. 그가 지닌 사회적 아우라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통하는 신체읽기를 통해 그런 그 면면 일부가 어찌 드러날지 궁금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주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관악산순환둘레길이다. 지난 일요일, 우선 관악구 구간 일부를 걸었다. 다음 주에는 관악구 구간 나머지와 금천구 구간을 걷기로 한다. 이번부터는 여태까지 숲, 나무를 보았던 큰 시선에다 길 주변과 조금 더 들어간 곳 곰팡이(버섯), 돌꽃(지의), 이끼, 그리고 생명의 여백 풍경을 살피는 작은 시선을 보탰다.

 

내게 걷기는 human-biont 한 몸 건강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공생하는 네트워킹을 몸으로 확인하는 시공간 창조 행위다. 몸 안팎을 두루 살피며, 속도와 시야를 조절한다. 혹한 견디는 작은 생명이 저마다 지닌 빛깔과 풍경을 보며, 놀라거나 탄식한다. 움직일 수 없는 생명들이 자아내는 지극한 자태는 물론이거니와, 작은 동물이 남긴 자취 또한 눈물겹다.

 

낙성대로 내려오기 직전, 길 저만치 죽은 나무 등걸 우묵 자리에 눈길이 닿았다. 거기 도토리 몇 알이 모여 있다. 자연적으로 떨어져 그리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도토리나무가 있지도 않고, 우묵 자리 모양새상 위에서 무엇이 떨어져 쌓일 수는 없었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마련한 창고일 가능성이 컸다. 손 그림자도 대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다시 나지막한 산등성이 넘어 내려오니 관악산일주문이었다. 인근 지하 허름한 식당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숲속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스마트폰 사진이라 그다지 세밀하지는 않지만, 지금 내 수준으로 표할 관심 정도는 담아내고 있었다. 허황하게 큰 언어로 살기 싫어 택한 삶을 알량한 사진 몇 장이 증명해주는구나 싶어서 가만가만 웃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송동 보성사 터 언저리에 회화나무 한 분이 3백 년 동안 서 계시다. 필경 조계사 회화나무 후계목일 텐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섶 나무다. 당신 고독을 스스로 품은 모습이 섬세하고도 은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implicity is not a simple thing._Charles Chaplin



사진/Ashley Watso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두어 해 동안 나는 삶에서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습관을 바꾸고 있다. 이미 몸이 완전히 적응한 부분도 있고 진행 중인 부분도 있다. 식사 습관은 몸이 길을 낸 듯하다.



오후 네 시에 하는 저녁식사(!)를 위해 가까운 시장 떡집에서 떡을 산 적이 있다. 금방 만들어서 따뜻하기에 얼른 한 입 베어 물었다. 밥알이 그대로 씹혔다. 오랜 기억 습관에 따르면 이래서는 떡이 아니다. 처음에는 얼핏 '서둘러 만들어서 이런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떡집에서 무슨 이런.......다음엔 가지 말아야겠군.' 했으나, 곧 이어 '그럴 리 없다. 돈 받고 파는 떡을 어떻게.......' 고쳐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는 기어이 퇴근길에 그 떡집을 들렀다. 주인이 말했다. "요즘 이 밥알쑥떡이 대세인 거 모르셨구나. 일찌감치 다 팔렸어요."

 

모르면 물어야 한다. 사물 이치고 존재 본성이다. 자기 기존 지식 틀 안에서 타자를 해석하고 말면 오해 넘어 오판에 의거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 돌입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양을 늘여가며 수면제를 복용해 그 부작용으로 자율신경실조는 물론 추체외로 증상이 격심하고 섬유근육통에 시달리는 팔십 노인이 내가 처방한 한약을 두 제도 채 복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약 효과가 없으니 그만 먹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왜 그는 약 처방한 치료자에게 질문하지 않고 치료 받는 입장인 자기 판단을 따랐을까?

 

밥알쑥떡 건과 달리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단 과정에서 그 동안 여러 번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앓은 병을 한 달도 되지 않아 변화 없다고 그만두기를 반복한다면 그는 병을 치료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불치병을 앓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잘 살아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상 어린아이로서 팔십 년을 살아온 셈이다.

 

이런 환자, 의외로 많다. 생명은 시작에서 끝까지 배우는 과정이다. 배움은 질문에서 시작하며 얻은 답은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는 발판일 뿐이다. 같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상태를 아인슈타인은 insanity라 했다.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말 같은 진리는 다시없다. 나는 치료자로서 그에게 정중하고도 겸손히 의학적 진실과 거기 터한 의견을 피력했다. 예상대로 답은 없었다.

 

나는 간절하게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생명네트워킹에 그 이름을 알리고 어떤 인연을 통해서든 건강과 성숙으로 향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 조심조심 요청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문처럼 되뇌어보았다. "Ancora Imparo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