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어 해 동안 나는 삶에서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습관을 바꾸고 있다. 이미 몸이 완전히 적응한 부분도 있고 진행 중인 부분도 있다. 식사 습관은 몸이 길을 낸 듯하다.



오후 네 시에 하는 저녁식사(!)를 위해 가까운 시장 떡집에서 떡을 산 적이 있다. 금방 만들어서 따뜻하기에 얼른 한 입 베어 물었다. 밥알이 그대로 씹혔다. 오랜 기억 습관에 따르면 이래서는 떡이 아니다. 처음에는 얼핏 '서둘러 만들어서 이런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떡집에서 무슨 이런.......다음엔 가지 말아야겠군.' 했으나, 곧 이어 '그럴 리 없다. 돈 받고 파는 떡을 어떻게.......' 고쳐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는 기어이 퇴근길에 그 떡집을 들렀다. 주인이 말했다. "요즘 이 밥알쑥떡이 대세인 거 모르셨구나. 일찌감치 다 팔렸어요."

 

모르면 물어야 한다. 사물 이치고 존재 본성이다. 자기 기존 지식 틀 안에서 타자를 해석하고 말면 오해 넘어 오판에 의거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 돌입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양을 늘여가며 수면제를 복용해 그 부작용으로 자율신경실조는 물론 추체외로 증상이 격심하고 섬유근육통에 시달리는 팔십 노인이 내가 처방한 한약을 두 제도 채 복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약 효과가 없으니 그만 먹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왜 그는 약 처방한 치료자에게 질문하지 않고 치료 받는 입장인 자기 판단을 따랐을까?

 

밥알쑥떡 건과 달리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단 과정에서 그 동안 여러 번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앓은 병을 한 달도 되지 않아 변화 없다고 그만두기를 반복한다면 그는 병을 치료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불치병을 앓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잘 살아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상 어린아이로서 팔십 년을 살아온 셈이다.

 

이런 환자, 의외로 많다. 생명은 시작에서 끝까지 배우는 과정이다. 배움은 질문에서 시작하며 얻은 답은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는 발판일 뿐이다. 같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상태를 아인슈타인은 insanity라 했다.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말 같은 진리는 다시없다. 나는 치료자로서 그에게 정중하고도 겸손히 의학적 진실과 거기 터한 의견을 피력했다. 예상대로 답은 없었다.

 

나는 간절하게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생명네트워킹에 그 이름을 알리고 어떤 인연을 통해서든 건강과 성숙으로 향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 조심조심 요청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문처럼 되뇌어보았다. "Ancora Imparo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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