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의 쇠퇴는 자유무역에 대한 태도를 통해 가늠할 수도 있다. 자본은 정상적인 성장을 하려면 그 축적이 애초에 개시된 나라를 벗어나 해외에서도 시장을 찾아야만 한다. 자본 축적의 원리상 국내에서는 생산된 상품을 모두 소비할 시장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 원인은 자본의 축적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자본가는 잉여가치가 포함된 상품을 시장에서 판매해 남는 이윤을 재생산 과정에 투하해 축적을 진행하는데, 인구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들이 삭감되기 일쑤인 임금만 받아서는 생산된 상품이 국내시장에서 모두 팔리기는 불가능하다. 자국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발달시킨 사회는 그래서 으레 자유무역을 외국에 요구하고 나선다. 19세기 말 조선이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다 양요와 식민 지배를 당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긴 일이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 자유무역을 제창하기 마련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나라로 19세기의 영국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진행한 결과 급성장한 산업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에서 시장을 개척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도 알려졌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자국에서 생산한 상품을 국제시장에서 판매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영국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도 크게 표방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철폐하는 것이 인류 해방에 필수적임을 논파한 칼 맑스가 자신의 연구와 집필을 영국에서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독일과 미국 등이 새로운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영국의 위상은 급속하게 추락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이 ‘자유 진영’의 맹주로 부상해 자유무역의 수호자 노릇을 한 것도 세계 최대의 산업국으로 부상한 것의 결과다. 대전을 거친 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업 국가로 부상했다. 그것은 추축국이던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은 물론이고 함께 연합국을 이뤘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산업기반이 철저히 파괴된 것과는 달리 미국은 전쟁의 직접적 폐해를 면하고 오히려 산업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5년에 GDP가 세계의 50%, 산업생산은 66%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해져 자유무역의 최대 주창자가 되었다. 자국의 넘쳐나는 생산물을 처리하려면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당연했던 셈이다.

21세기 초에 이른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미국이 자유무역의 수호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난 11월 대선에서 47대 대통령으로 당선한 도널드 트럼프가 그의 첫 번째 재임 기간(2017〜21년)에 취한 무역 정책에서도 그런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경제 대국으로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을 겨냥하여 관세 폭탄을 투하했고, 그에 대해 중국은 자유무역의 대의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항의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자유무역에 대한 양국의 태도 차이는 어느 쪽의 산업적 능력이 더 막강한가에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 제조업 생산량을 놓고 보면 미국은 2021년 기준 세계의 16%, 중국은 2022년 기준 31%로 중국이 두 배가량 더 많다.

미국이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 자국 이해에 반하는 나라에 대해 예외 없이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조선과 쿠바, 이란, 베네수엘라, 러시아, 중국, 그리고 최근에 합법 정부가 붕괴한 시리아 등 합치면 그 인구가 수십억에 달하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최근에는 심지어 대표적 우방인 유럽연합에 대해서도 자국의 요구를 잘 듣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가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미국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제력이 그만큼 약화했다는 증거다. 미국 자본주의는 1970년대 중반에 케인스주의 또는 수정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축적 전략을 전환한 뒤 세계화와 금융화와 더불어 탈산업화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 산업기반을 대거 제삼세계 또는 남반구 국가들로 이전시킨 후유증을 이제 톡톡히 앓는 중이다. 미국의 탈산업화 흐름이 더욱 강화된 것은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1990년대 이후다. 하지만 그 결과 미국은 산업 생산력이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뒤진 데서 볼 수 있듯이 더 이상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의 위상을 누리지 못한다.

미국의 탈산업화 실상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지원하겠다며 전쟁을 부추긴 우크라이나에 이제 더 이상 충분한 무기를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예산상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대의 국방비를 소모하고 있으나 미국은 무기 생산을 포함한 군사적 생산력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더 이상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실제로는 허장성세인 점도 갈수록 뚜렷해진다. 최근에 미국은 막강하다는 항공모함이 중동의 최빈국 예멘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견디지 못해 홍해에서 철수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제국의 쇠퇴는 기정사실이다. 미국의 국력 쇠약은 지정학적 변동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대 이후 세계질서가 단극적 체제로 바뀌며 미국은 한동안 그 체제의 우두머리로 군림해 왔다. 그 사이에 자신이 편의로 정한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내세우며 미국이 유엔헌장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세계질서를 유린한 행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미국의 위세가 쪼그라드는 모양새가 분명하다. 경제력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직도 세계 최대의 군사비를 쓰고 있지만, 더 이상 이전의 군사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자유 진영 수장’으로서의 지도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 퇴조는 세계 인구의 15%에 불과한 ‘집단서방’을 빼고 나면 남반구 또는 나머지 세계 나라들이 갈수록 미국을 경원시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제국의 쇠퇴는 근대 세계체계에 중대한 한 변곡점이 생겼다는 징후에 속한다. 세계체계는 지난 500년 동안 자본주의를 먼저 발전시킨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지배 아래 놓여 온 셈이다. 오늘날 G7으로 통하는 국가들이 그들 제국주의 세력에 해당한다. 그들 국가는 미국의 속국으로 기능하며 비서구, 남반구, 제삼세계 국가들을 유린해왔으나, 최근에 들어와서 중국과 러시아, 인도, 이란 등 비서방 브릭스 국가들이 부상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조세가 뚜렷하다. 이런 점은 구매력평가지수 GDP로 보면 중국은 미국을 앞질러 세계 1위가 되었고, 인도는 과거 자국을 식민지배한 영국의 경제력을 추월해 세계 3위로 올라섰으며, 러시아는 독일을 제치고 유럽에서는 1위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 2000년대까지 세계 2위이던 일본을 제치고 이제는 인도 다음으로 세계 4위 경제 대국으로 오른 점이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헤게모니 쇠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제국과 그 수하인 서방 또는 (영광스럽게 한국도 일원인) 집단서방의 반격과 역습도 만만치 않다. 헤게모니는 위기에 처할 때가 위험한 법이다.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의 축적 위기에 처하자 축적 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지배가 발동된 뒤 사회적 위기가 끊이지 않은 것이 좋은 예다. 미국의 최근 행태도 헤게모니 위기의 징후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카드를 내던질 만큼 산업적 생산력이 약화했고, 군사적으로는 서아시아 최빈국인 예멘의 공격을 막지 못해 홍해에서 ‘세계 최강’ 항공모함을 철수시켜야 할 정도로 약체가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주요 특징이라고 말한 정치적 지도력을 더 이상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의 테러 국가다. 자국 경제가 뒤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미국이 잘하는 것은 타국에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이고, 국제정치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시도하는 것이 타국을 상대로 한 색깔 혁명 또는 체제 전복 공작이다. 더구나 미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서아시아 등 특정 지역의 발칸화를 위해 자국 기준으로도 테러 집단인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에 시리아에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의 지도자 아부 모하마드 알-줄라니는 미국 정부가 1천만 달러의 포상금을 걸어놓은 테러리스트인데도 미 CIA는 그와 그의 세력을 지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국제법을 가장 많이 위반하는 나라, 유엔에서 채택되는 결의안에 가장 많은 반대표를 던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최근에 들어와서 자국이 연루된 지정학적 갈등에 대해 평화적 해결책을 외면하는 미국의 태도는 도를 넘었다. 이것은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와서 특히 심해진 현상으로, 우크라이나전쟁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사실상 전쟁 당사자이면서 상대방인 러시아와 어떤 외교적 접촉도 하지 않는 대책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능력이 약화하면 할수록 미국의 테러, 폭력, 불법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가고 그 결과 세계가 온갖 위험에 직면해 있다. 집단서방의 일원으로 미국의 충실한 속국인 한국도 그런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국내 정국을 강타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도 미국이 국제관계 관리에서 테러리즘에의 의존도를 높이는 것의 연장선상인 점이 크다. 군부 상층부가 대통령과 함께 벌인 비상계엄 또는 내란 획책에 미국이 직접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군이 주둔한 나라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 정황을 미국 정보망이 놓쳤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군부는 미군의 예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군 상층부가 대대적으로 가담한 내란에 미국이 몰랐다면, 상식이 용납하지 않는다.

퇴임을 몇 주 앞둔 미국의 현임 대통령 바이든이 윤석열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 12일 지난 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와 길게 통화했다는 사실이 매우 불길하게 느껴진다. 최근 수사당국이 자신을 조여오는 데 대한 윤석열의 저항이 완강하고, 한덕수가 야당이 요구한 일련의 특검법을 거부하고, 여당의 원내대표 권성동이 헌법재판관 임명 등을 방해하기 위해 자의적 법 해석을 내놓는 것 등은 그 통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헤게모니의 약화 속에 미국은 갈수록 폭력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각종 테러 지원, 타국에 대한 불법적 침략 또는 타국 자산의 불법적 약탈, 자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나라의 정권 전복 등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 미국이다. 그런 점을 보면 미국은 한국에서도 자국 이익을 지키는 친미 세력을 지원하고 그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는 단호히 방어에 나설 것임이 자명하다. 최근에 들어와서 가장 친미적인 노선의 정책을 펼쳐온 정권이 윤석열 정권이다. 이번 내란과 탄핵 정국에서 윤석열 도당이 시간이 갈수록 공세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미국을 뒷배로 믿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제국의 쇠퇴로 세계는 더욱 위험해졌다. 한국도 그 여파에 휩싸인 상황이다. 윤석열 도당이 미국의 지령을 받고 계엄과 내란을 획책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윤석열 정권과 국내 극우세력이 친위쿠데타 실패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제국의 지배력을 온존할 온갖 수단을 가동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반동을 척결할 수 있는 것은 민중밖에는 없다. 지금은 누구보다 민중이 가두에 나서야 할 때다. 자유주의 세력인 야당이 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정권 교체라고 봐야 한다. 야당은 집권 후가 되면 쇠퇴하는 제국의 또 다른 앞잡이가 될 공산이 높다. 제국이 한국에서 벌이거나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태의 가장 큰 희생자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 민중이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편으로는 윤석열의 탄핵과 여당의 해체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탄핵 이후의 정국을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것을 막으려면, 민중의 항의와 저항이 가두에서 펼쳐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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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광석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21일, 수원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전남 구례에서 올라온 트랙터 한 대는 눈길 가파른 경사로 발판을 내려오다 전복되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출발 전에 ‘가자 서울로, 윤석열 체포하고 농민헌법 쟁취하자’고 앞에서 외쳤고 뒤에서는 ‘혹시 경찰이 막으면 남태령 일거야’ 누군가 말했다. 트랙터는 총 37대였다. 나는 앞 트랙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뒷 트랙터에 밀려가는 것 같았다. 중간에 대열은 잠깐 쉬면서 생밤 몇 개를 나누어 먹었다. 트랙터 속도는 느려졌고 드문드문 경찰이 보였다. 이제 막는구나 생각했다. 남태령이었다.

몇몇 시민은 스케치북에 ‘멋져요, 파이팅’을 적어와 응원했다.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약간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차안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차안에서 박수치는 사람, 차안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편에서 보는 사람들은 저편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만난 일 없고, 만날 날 없을 텐데 같은 고장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경찰의 진은 남태령을 넘어서 경사면에 위치했다. 14시였다. 서울로 가는 차선과 서울에서 나오는 차선에는 중앙분리대가 없이 30센티 높이의 보도블럭이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성질 급한 트랙터 한 대가 그곳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뛰어들어 세 대가 연달아 경찰의 저지선을 넘었다. 경찰은 반대차선도 차벽으로 급히 막았는데 네 대는 이미 현장을 벗어나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로 진출했다. 그들은 막힌 자리에 트랙터를 놓고 돌아와서는 대열을 이탈하니 경찰도 막지 않고 갈 데가 딱히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남태령 양방향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첩첩산중이며 고립무원이며 진퇴양난이며 속무수책이었기 때문에 남태령은 대열이 살거나 죽을 자리였다. 오후 해가 가파르게 졌다. 령은 양쪽 높은 봉우리 중간에 있었다. 령은 서울의 길목이며 산을 낀 수도방위사령부 철책은 삼엄했다. 그곳이 1980년에 노태우가 사단장이었다는 사실, 이번 쿠테타에서는 지하 벙커에 잡아온 정치인을 가두려고 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는 계속 고팠다. 빵과 떡이 일부 돌았으나 그것도 바닥났다. 인근에 상점은 없었다. 령을 넘어가려는 바람의 숨소리는 거칠어서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않고 트랙터에 안에서 시동을 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내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아 여기서도 춥고 배고픔에는 계급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19시 쯤 경찰 10개 중대가 견인차, 지게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들어내려고 하는 구나’ 경찰이 들어내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트랙터를 견인하려면 기아를 빼야 하는데 기아를 넣은 상태에서 열쇠를 빼면 그들은 바퀴가 구르지 않는 트랙터를 사지를 묶어 끌고 가야한다. 그러면 클러치박스와 미션이 다 아작난다고 누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버티면서 진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트랙터에서 시동을 끄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따뜻한 떡볶이가 왔다. 시민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는데 두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김밥이 왔다. 있을 때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먹었다. 핫 팩이 왔다. 핫 팩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사진이 있었다. 여기가 그들이 지키는 고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저녁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두 자리를 뜨면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언론이 없을 때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여덟시가 지나자 광화문에 있는 시민들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다. 늦은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가 되자 트랙터 옆에 삼삼오오 사람이 보이더니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앞 사람은 앉으라더니 더 큰 엠프를 행사장에 가져온다고 말하더니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미치고 노래는 더 커지고 저녁 10시가 되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한 5천 명, 아니 만 명, 숫자는 가늠 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느릿느릿 무장무장 밀물이 뭍을 압박하듯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곳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열한시면 지하철이 끊긴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람 차가운 령에서, 군인들도 서 있기 어려운 이 추운 고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10시가 넘자 사회자가 걱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은 올 수도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어찌합니까?’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것 같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샘 농성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이었다. 손잡이 길이도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었다. 물어보니 가격도 달랐다. 왜 그런 것 까지 물어보냐고 웃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최저 가격이 3만원 이었고 최고 가격이 10만원 이었다. 그들 대게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고 준비성도 좋아서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와 방한 숄더, 돗자리와 장갑, 작고 엷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유심히 들었는데 티어스와 밤이면 밤마다, 여행을 떠나요, 남행열차, 질풍가도, 다만세와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와 BTS 등을 불렀고 여기에 적지 못한 노래가 더 많다.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도 불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었다. 가사와 가사 사이, 시로 말하면 1연과 2연 사이에 불과 1, 2초 간격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과 ‘차빼라, 차빼라’를 떼창했는데 원래 그 노래에 그 가사가 생겨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회 사회자라 하기는 어렵고 무슨 DJ라고 해야 할 주관자는 노래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떼창을 유도했는데 실로 이것은 경이로운 사태였다. 그들은 밤새웠고 그것을 보는 농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추고 말하고 한숨 쉬고 야유하고 환호했다. 처단할 것을 결의하고 울지마라고 위로했다.

그들은 순서대로 발언대에 올라 3분을 말했는데 그러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광주에 사는 롯데 팬, 전라도 혐오 때문에 괴로운 대학생, 이번에 수능을 본 재수생, 자신이 농업지대에 산다는 학생, 부산에서 주말마다 올라온다는 24살 여성, 수방사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직장인,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여성, 대학을 가기 위해 뒤늦게 수능준비를 한다는 30대 여성, 취직이 걱정인 4학년 여학생,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성소수자 남성,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당한 친구를 둔 여성, 양평에서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직장인을 따라온 양평에서 혼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연단에 선 고 신용범의 딸 신우리, 집회장의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20대 남성,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노조운동을 한다는 21살 여성 등이 말했다. 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었고 박수의 가열참은 겨울 공기를 뚫었다.

농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양곡법을 거부한 것에 분노한다고, 국산 쌀밥 먹는 경찰은 부끄럽지 않냐고, 국민의힘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이제 깨진다고, 민주주의는 광장에 있다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전봉준 티셔츠를 입고 다니겠다고 말했는데 집회 때 마다 큰 소리로 현 시국을 개탄하는 민주단체 지도자들 보다 말을 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자신들이 할 말을 적어왔는데 발언의 마무리를 구호로 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라가 부끄러웠고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잊을 수 없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활화산이었고 불화살이었다. 최도은은 음악도 없이 불나비를 불렀는데 입때껏 그런 날 것 같은 포효를 본 적 없다. 맥박도 핏줄도 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를 떼창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몇 사람 깨워서 서울로 향했던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진리와 죽은 자가 갔던 길과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산자의 길을 생각했다. 우금치에서 죽은 자의 몸 위에 포개진 산자의 몸과 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의 동호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는 연민과 분노를 생각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체면과 양심이 대열을 분산의 길에서 구했고 연민과 분노가 트랙터의 길을 열었다.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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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트위터 읽다가 남태령으로 행로를 정한다. 날씨가 제법 매섭다.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저체온증으로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미안한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사당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간다. 수많은 공회전 차량으로 대기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남태령역으로 다가가자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가 들려온다. 시민 발언, 구호, 연호, 박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며 관악산과 우면산 발치를 뒤흔든다.

 

경찰 버스로 왕복 8차선 과천대로를 가로막아 놓았다. 그 너머 붉은빛 트랙터들이 마치 장수처럼 서서 금방이라도 내달릴 듯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늘 그렇듯 농민도 냅다 걷어찬 윤석열을 체포하겠다고 용산을 향해 온 농민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고 서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중이다. 사회자가 간간이 지원 물품을 소개하면 열기는 한층 고조된다.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다.

 

각종 단체 깃발이 펄럭인다. 누구나 잘 아는 딱딱한 조직은 물론 말랑말랑한, 심지어 장난기 가득한 알 수 없는 단체 깃발로 하늘은 물결이 된다. 하지만 여기도 홀로 나온 10, 20대가 곳곳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한쪽 구석에 앉아 마른 빵을 먹는 소녀가 있다. 나는 보온병을 꺼내 물 한 컵을 건넨다. 해맑게 웃으며 받아 마시고 돌려준다. 나는 엄지척을 해 보이고 일어선다. 저 나이 때 나는 저 아이처럼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소식을 알리면서 시간을 살핀다. 점심 식사 하기 위해 따라갈 동선을 생각한다. 지원된 음식을 나같이 부끄러운 늙은이가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텅 빈 과천대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언제 어떻게 이 차로 한가운데를 걸어 남태령을 넘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1차선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과천 선바위역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먹기로 하고 고갯마루를 향해 간다. 생각보다 남태령은 나지막하다.

 

남태령 본디 이름은 여우고개였다. 능행 길에 정조가 묻자 차마 그대로 아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과천 이방이 남쪽 큰 고개란 그럴싸한 이름을 급조해 올린 뒤부터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어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나 백성 실제 삶과 얽힌 서사를 도려낸 이름은 본디 것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깊은 숲이 고개 양쪽에 있어 실제로 여우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 이름했다니 말이다. 여우고개가 남태령보다 더 정겹고 사랑스럽지 않나.




 

생각보다 나지막한 여우고개를 예상보다 일찌감치 넘어 시간이 남는다. 나는 행로를 바꾼다. 선바위역 가기 전에 우면산 서쪽 능선으로 올라가 과천대로와 평행한 숲길을 걸어 다시 남태령역으로 간다. 산 넘어 이따금 아스라이 들리는 함성을 향해 간다. 돌아가 보니 사람이 더 늘어나 있다. 사당으로 나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또 남태령역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또 더 늘어나 길을 가득 메운 행렬은 고개 쪽 경사를 따라 부쩍 길어진다.


 

오늘 뭐가 돼도 되겠구나 싶다. 가족과 한 저녁 약속 때문에, 해 떨어지기 전 남태령역을 떠난다. 역 안 한 귀퉁이에 오도카니 홀로 앉아 있는 여고생에게 묻는다.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했어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그냥요.” 그냥 민주주의다. 얼마 뒤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농민에게도 1030 여성에게도 감사한다. 오늘부터 남태령, 아니 여우고개는 130년 만에 전봉준이 부활한 우금티. 명신이네는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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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라도 아주 조금만 먹는다. 처음부터 무슨 목적이나 지향을 지니고 그리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태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99.9%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은 동물성 식품인 모유 아니면 우유지만 나는 미음이었다. 어머니에게서는 젖이 나오지 않았으며, 1950년대 중반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는 우유를 구할 수가 없었다. 미음 머금은 솜을 입술에 대고 짜 먹여 연명시켰다 한다. 이 곤경이 미각을 확정했다.

 

붉은빛 음식이 식욕을 더 자극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풀빛 음식을 보면 눈이 반짝인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신선할 때는 물론 데칠 때 나는 나물 냄새, 뜸 들 때 나는 밥 냄새, 심지어 내가 먹지도 못하는 소여물 끓이는 냄새까지 좋아한다. 조사에 따르면 인류 공통으로 가장 이끌리는 냄새가 바닐라 냄새라고 한다. 이름이 그래서 상상하기 어려우나 그 냄새가 근원에서 쌀, 그리고 벼 냄새라는 사실을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북미 대륙 토착민이 향모라고 부르는 볏과 식물 기원 아로마를 바닐라그라스라고 부르는 까닭도 거기 있을 테지만, 모두 바이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식물에 빙의되어 공부하면서 식물-지의류, 균류, 조류 포함-에 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기 위해 먹는, 그러니까 죽이는 식물을 대하는 자세가 영 달라졌다. 식물 공부 끄트머리에 더 큰 회심이 일어나 제국주의 공부 길로 들어섰는데 이때 식물과 식사에 관한 생각이 한 번 더 바뀌었다. 무엇보다 식물 생태 본성인 평등 분산 팡이실이, 그 네트워킹을 내 생명에 받아들인다는 각성이 눈부신 변화였다. 식물이 지니는 영양소를 분석해 그래서 몸에 좋다는 따위 서구 기계론과 환원주의 관념을 벗어던진 나지막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 연장선에서 일어난 변화는 식물을 먹는 일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일이라는 정치적 각성이었다. 제국주의 본성이 바로 평등 분산 팡이실이, 저 공생 생태계를 멸절하는 전쟁이고, 그 대표 병기가 바로 육식이다. 육식은 동물 생태 본성인 불평등 집중 기관 구조, 저 기생 생태계를 내 생명에 구현하는 일이다. 육식 중독 인간이 제국 신민 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 저주는 군대를 동원한 거대 전쟁으로 풀 수 없다. 가장 사소한 일상, 그러니까 식탁에서부터 제국 생활 양식을 걷어내면서 식물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지닌 팡이실이 본성을 찾아가야 가능하다.

 

인간에게 과연 팡이실이 본성이 있는가? 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진화사에 기댄다: 거대 파충류에게 패배한 포유류는 숲으로 쫓겨났다. , 그러니까 식물에서 포유류는 팡이실이 본성을 배웠다. 포유류 팡이실이 본성은 승자 파충류에 없는 공동체 형성으로 나타났다. 서로에게 닿고 이어짐으로써 위험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적응을 통해 패자 필생 승자 필멸이란 진리를 세웠다.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영장류에서 다시 인간으로 진화하는 동안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변이가 일어났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공동체 본성이 남아 있다.

 

공동체 본성은 장 신경-무수 미주신경(미주신경은 부교감신경을 이루는 주축이다)-교감신경-유수 미주신경으로 이어지는 자율신경 진화 과정에서 획득했다. 유수 미주신경은 타자와 얼굴을 마주해 서로 이어지며 놀며 나아가 더불어 안전한 생명 활동을 영위하게 하도록 진화한, 고대 미주신경과는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다른 곳에 도달하는 또 다른 미주신경이다. 스티븐 포지스가 말하는 () 미주 이론인데 바로 이 두 번째 미주신경이 공동체 본성 증거다. 아직 수정 보완 확장할 일이 남아 있는 이론이지만 근본 진실성은 분명하게 확보했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 이론에 두 질문을 붙여 근원 서사를 그려보고 싶다. 첫째, 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이 이 시스템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둘째, 숲은 이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이야기는 공동체 개념을 지구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는 토대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 전체를 수탈·살해하는 제국주의와 맞설 수 없다. 백반집에서 먹는 6천 원짜리 식사로 반제 전투를 하려고 할 때, 쌀과 곰취와 버섯이 전우가 아니라면 나는 반제 전사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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