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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평점 :
이주에 관한 서구 사고방식은 주로 많은 이들이 새로 정복한 먼 대륙 영토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정착형 식민주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이런 패턴은 실제로 인간 이동 역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유럽이 북·남미를 정복하기 전에는 인간들이 대부분 아예 눌러살 목적으로 먼 곳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수천만 명 유럽인이 다른 대륙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모국을 떠난 일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됐다. 인간 이주 역사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이 사건은 이주에 관한 현대적 개념을 더없이 강력하게 규정했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모든 이주자가 그들 최종 도착지 나라에서 아예 눌러살기를 원한다고 전제한다.···(247~248쪽)
서구 국가에 영구 정착하려는 이주자에 대해 과도하게 우려하는 우익 담론은 현대 이주에 대한 근원적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동이 잦은 이 시대에, 영구 정착은 더 이상 주된 이주 패턴이 아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인도적인 방법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컨대 오늘날 인도·북미·유럽연합 일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듯, 순환 이동 농업 노동자에 대한 노골적 착취를 예방하는 규제 메커니즘과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251~252쪽)
스티브 테일러와 아미타브 고시는 전혀 다른 인생 맥락을 지녔지만, 두 사람 이야기를 통합해보면 서구가 견인한 인류 여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 번에 걸친 인도유럽어족 이주에서 비롯한 거대한 변동이 결국 오늘날 인류 전체 존멸 문제에 닿았으므로 이런 관지를 확보하는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두 이야기를 통합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아미타브 고시는 인도유럽어족이 일으킨 제1차 이주에 눈길 자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이주는 스티브 테일러가 『자아 폭발-타락-』에서 말한 이를테면 고대 제국주의 정복 서사다. 스티브 테일러는 인도유럽어족이 일으킨 제2차 이주 자체를 눈여겨보지 못했다. 제2차 이주는 아미타브 고시가 여기서 말하는 근대 제국주의 정착형 식민 서사다. 이 두 사건은 인류와 지구 생태계 모두에게 일어난 거대한 변화에서 서로 다른 인과를 주고받았지만, 여기서 탄생한 제국 체제들이 인류와 생태계에 중대한 균열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이주 없는 제2차 이주란 불가능하므로 통합된 관지가 필요하다.
스티브 테일러가 제1차 물결이라고 명명한 문명비판 운동은 제1차 이주를 전제한다. 제2차 물결은 제2차 이주를 전제해야 한다. 스티브 테일러는 여기서 실패했다. 훨씬 더 치명적인 제2차 이주를 전제할 때 제2차 물결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지 못했다.
아미타브 고시는 반대로 제1차 이주 역사에 눈길이 닿지 못함으로써 제국주의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얼마나 견고하고 치밀한 차별과 살해 구조를 만들어 놓았는지 살피는 데 미흡했다. 근대 제국주의를 결결이 들여다보는 일만으로 내린 최종결론에는 ‘암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두 번에 걸쳐 영구 정착을 위해 대대적으로 이주함으로써 인도유럽어족은 방대한 대륙 땅들을 강탈했다. 글로벌 제국이 완성되자 이제는 그 문명이 일으킨 다른 이주 유형에 자기 범죄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동이 잦은 이 시대에, 영구 정착은 더 이상 주된 이주 패턴이 아니다. 순환 이주자에 대한 노골적 착취를 예방하는 규제 메커니즘과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그나마 속죄하는 길인데 투사(projection) 병리에 사로잡힌 제국은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제국이 중앙집중 관료체제로 무능과 경직, 그리고 팽창을 거듭하는 동안 파편 인간, 정치, 그리고 경제는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이들이 자연적으로 공동체와 생태학적 순환, 그 분권 네트워킹에 연착륙할 수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파국을 앞당기면 피해를 줄이고 경착륙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제국주의 이주가 아닌 노마드 이주로 사실상 국경을 지우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