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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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는 제2차 물결이 이룩한 진전의 온상이었다. 1960년대 후반의 히피 운동은 타락 초월 운동의 다른 측면, 즉 섹스와 육체에 대한 더욱 개방된 자세·희미해진 성 구분·(외양과 태도가) 점차 여성적으로 변한 남성·평등주의·비폭력·자연 합일·제1차 물결 때 발생한 동양 신비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들을 모두 보여준다.·······히피 운동은 현대의 타락하지 않은 문화에 가까운 무언가를 창조하려 한 용감한 시도였으며, “엄격한” 사회와 충돌하는 풍경은 어떤 면에서 원주민과 타락한 제국주의 문화 간의 충돌을 떠올리게 한다.·······히피 운동은 그 자체의 이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1970년대에 급속히 사라졌지만, 18세기부터 축적되어왔던 집단적 정신 변화의 강력한 표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409-410쪽)


1975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교에서 ‘두발단속’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두발단속의 주체가 ‘교련’이란 이름의 군사훈련을 시키는 현역 군인이라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어느 날 교련 시간에 출석 체크를 하면서 교관인 장교가 내 두발상태를 보더니 ‘짧게 자르고 오지 않으면 수업 받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왔다. 물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당연히 학점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계절 학기를 통해 학점을 받는 것으로 대처했다. 그 이후로 군대에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나는 마흔 가까이까지 어깨에 닿는 장발을 유지했다.


당시 나는 내 행동이 그냥 내 개인적인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선명하게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내 장발 정서는 이미 히피 조류에 닿아 있었던 듯하다. 군사정권이 기를 쓰며 막으려 했을 테지만 히피 스피릿에 국경이 가당키나 했겠나. 히피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으나 나 같은 주변인에게까지 물결쳤던 걸 보면 참으로 경이로운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히피가 급속히 사라진 것은 세상을 전복시킨 뒤 스스로 홀연히 사라진 로맨티스트 혁명가를 떠올리게 한다. 본질상 히피 혁명의 열매는 이렇게 맺어지고 나눠지는 게 맞다 싶은 중요한 사실 하나만 적시한다.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대안잡지 <Whole Earth Catalog>를 발행하여 글로벌한 가치를 지닌 상품들을 소개하고 우주 합일 주제를 다룬 글을 게재하기 시작한 것은 히피 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이었다. 이 잡지는 수평적·독립적·자발적 나눔의 삶을 지향한 히피 이상을 기술과 산업으로 구현한다는 취지를 담아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이 잡지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미국 IT 산업의 선구자들 중 상당수가 젊은 시절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또 그것을 구가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히피가 지향한 개인주의·참여· 연대·공유 등의 가치를 산업에 적용했다. 인터넷, SNS의 원리와 성격에 히피 이상이 녹아 있다는 것은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히피가 몰고 온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제2차 물결의 본진을 향한다. 성패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히피가 “그 자체의 이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살펴보는 일은 오늘 여기의 풍조에서 다음 한 걸음을 내다보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다.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근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처럼 히피 또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삶과 그 정신에 기댄 점이다. 각각 다른 관심에 따라 접근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관심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히피가 도달하지 못한 근원은 원주민의 삶과 정신, 그리고 자연에 깃든 거룩함이다. 이유는 둘이다. 우선,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히피는 대체로 삶의 “축제” 쪽으로 기울어진 경향을 띤다. 이것은 질탕함으로 흐른다. 삶은 “경배”이기도 하다. 이것은 거룩함으로 흐른다. 삶의 실재는 질탕함과 거룩함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 균형으로만 유장해진다. 이 균형이 깨진 곡절이 두 번째 이유에 해당한다. 히피는 원주민의 삶과 정서를 처음부터 능동적·적극적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서 운동을 펼친 것이 아니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한 방편으로, 이를테면 도구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수단을 거룩하게 여기는 정신이 인도유럽인에게 있을 리 없다. 히피가 원주민의 삶과 정신을 존재의 차원으로 밀어 올리지 못하고 에너지 차원에서 흘려보내다 소진해버리고 만 것은 필연이다.


히피의 아킬레스건에 손 댄 것은 다만 비판의 목적에서가 아니다. 우리가 히피의 “타락하지 않은 문화에 가까운 무언가를 창조하려 한 용감한 시도”를 계승해서 온전히 이루려면, 되 빠지지 말아야 할 어둠을 꿰뚫어보아야 하기에 그런 것이다. 히피 이후 인간은 자신에게서나 이웃에게서나 자연에게서나 더욱 거룩함의 감수성을 잃어가고 있기에 웅숭깊은 향도가 한층 절실하다. 거룩함을 가장한 엄숙떨기가 거대종교 판에서 시끄러이 광광대고 있는 이 때 참으로 거룩한 신의 소식을 전하는 소리 아닌 소리가 더없이 그립다, ㅅㅅㅅㅅ ㅅㅅㅅㅅ·······신성한 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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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갈색 스펙트럼에 휩싸인 이른 봄 나지막한 산에 이렇게 야심 없이 서로 조금씩 떨어져 핀 진달래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 그래서 얼마나 고운지 몰라, 저 새치름한 연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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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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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은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집단적 재산 소유·집단적 의사 결정·노동계급의 자치정부 등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역사관을 발전시켰다.·······(그들)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평등사회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권고하고 예언한 이상사회는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등사회에 매우 가까웠다.

  19세기 후반까지 사회주의는 유럽 전역에서 실제적인 정치세력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사회주의자 그룹은 의회를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러시아에는 의회가 없었으므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정부를 전복하는 방법이었는데 1917년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이 발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급진적 사회주의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기에 너무나 큰 도약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지나치게 야심적이긴 하지만, 제2차 물결은 정통 사회주의 정당들에게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나타나, 제도를 통해 작동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번창하면서 민주주의도 꽃을 피웠다. 1790년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헌법이 모든 사람-여성은 제외되었지만-의 평등을 선언한 국가는 미국·스위스·프랑스뿐이었다.·······21세기 초반 현재 119개국으로 늘어났다.·······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404-406쪽)


이승만-박정희 체제의 거대 아이콘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이 땅에 준동하고 있는 나경원이 같은 “토착 왜구” 종자들이 만들어낸 왜곡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것이 “반공주의=민주주의” 등식이다. 자신들의 매판적 본질을 감추기 위해 미군정 아래 만든 프레임이다. 오늘날까지 조중동서껀 ‘개’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튜브, 카톡을 통해 양산하며 적폐체제의 망령을 불러내고 있다.


공산주의, 그러니까 “급진적” 사회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사회주의가 번창하면서 민주주의도 꽃을 피웠다.”다. 이치를 따져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는 공산주의 이상이 온전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로쿼이 민주주의에서라면 반공주의 토착왜구 종자들이 당최 생겨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것은 스티브 테일러가 제시하듯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기에 너무나 큰 도약”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주의 이론 자체의 흠결도 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지적하듯 돈과 사유私有의 본질에 관한 피상적 통찰, 자본의 사용 이익 제거, 의무·징발을 정당화하는 국가제도에 대한 편향된 태도도 중대 요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계의 신성성을 폐기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자본주의의 근원인 분리 이데올로기를 간파하지 못한 탓이다.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진정한 제2차 물결로 완결되려면 이로쿼이 사회주의-민주주의의 정수를 재확인해야 한다. 타락 이전 인류가 인간을, 자연을, 세계를 어떻게 감지하고 인식하고 수용했는지 다시 배워 깨우쳐야 한다.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신성성을 되찾았을 때, 그 정치적 내용은 어떨까?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를 길잡이로 삼을만하다. 경제 이야기지만 정치에까지 그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다. 신성한 정치학을 구성한다면 그 근간은 저자가 직접 제시한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이다. 낯익은 풍경이다.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 그러니까 제국주의 타도전선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이들은 “대문자”(미셸 마페졸리) 정치의 종언을 의미한다. 대문자 정치의 종언은 대문자 경제의 종언과 그대로 맞물린다.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의 제거와 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통화의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찰스 아이젠스타인). 이들의 주술적 상호침투로써 신성한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은 완결의 길을 간다. 아브라카다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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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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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쇠퇴하는 데에는 과학 발전과 물질 번영 같은 많은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가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전능한 실체가 세상을 돌보고 모든 고통은 내세 때문에 정당화된다는 것을 간절하게 느껴야만 할 필요가 있는 타락한 정신이 더 이상 강력하지 않은 까닭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유일신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믿음과 관행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하였다.(411쪽)


종교, 특히 거대유일신교의 쇠퇴 추세는 분명하다. 제도적 종교가 정치경제적 이권세력으로 엄존하는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인류 정신에 더 이상 중요하지도 강력하지도 않은 형해다. 이대로 종교는 사라지고 마는가? 아니다. 타락한 정신이 만들어낸 거대유일신을 없애고 무신론을 집어든 정신도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타락에서 벗어난 인간 정신이라면 신의 참 실재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스티브 테일러는 그다지 찰진 관심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종교를 다루는 문맥 바깥에서 근원적 의미로 보면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종교는 내가 생각하는 종교보다 훨씬 덜 관건적인 무엇인 듯하다. “유일신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믿음과 관행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하였다.”는 언급 이상의 내용이 이 책에 더는 없다.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한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제2차 물결일 수 있는가? (종교의) 제2차 물결에 대한 인식이 투미해지지 않으려면 (종교의) 제2차 타락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야 한다.


제1차 타락이 기독교를 일으켰다면, 제2차 타락은 기독교가 일으켰다. 제국주의의 선봉도 후견도 모두 기독교였다. 제1차 물결이 기독교 밀교 전통을 일으켰다면, 제2차 물결은 기독교 밀교 전통을 주류로 진입시켰다라고 도식화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주류로 진입한 기독교 밀교 전통이 제국주의 타도의 선봉이자 후견이 되지 않는 한, “제2차”라는 표현은 무의미하다. 종교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다? 허무맹랑하게 느끼는 사람은 가짜 종교의 노예거나 천박한 무신론의 희생양이다.


제국주의 아킬레스건을 벨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의 소재는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다. 전형적인 모델이 이로쿼이연합이다. 이로쿼이연합 정신의 핵심은 그들의 신화다. 그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영성을 “이로쿼이 종교”라 이름 한다면 그 내용은 공동체적 각성, 생태학적 다신, 주술적 합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대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힘인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와 상응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참 종교는 개인적 수행과 영성을 넘어서는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헤아리기조차 힘든 장외 미세생명체 하나하나가 신임을 알고 경외하는 ‘분위기’여야 한다. 과학 너머의 상호작용이 주는 황홀함의 체현이어야 한다.


주류로 진입한 밀교 전통이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만 제1차 물결의 리뉴얼에 지나지 않는다. 제1차 물결의 리뉴얼로는 세계가 지니는 신성함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신성함의 저 불온한 조건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불온한 조건은 “주술”이란 말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주술은 네트워킹 화학이다. 이 숭고한 화학 방정식에는 미지수 너머의 해가 있다.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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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듬뿍 머금은

만개 박두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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