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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지음 / 바움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서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 코너로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엔 인문 신간, 그 다음엔 사회 신간, 그리고 철학과 종교를 돌아 마지막으로 한의학, 대략 이런 순서지요. 한의사인데 거꾸로 됐나요?^^
강남 영풍 시 코너에서 엊그제 이 시집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제 눈에 이제서야 들어온 것일 테지요. 사실 특히나 시집은 시절인연이 확실히 있는 모양입니다. 남들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뒤늦게 살 떨려 하는 게 시에서는 그닥 허물이 안 되는 듯하니 말입니다.
2.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받은 느낌은, 마치 운전 한 몇 년 하면 자신이 운전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운전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극적으로 말하면 남의 시가 아닌 내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것처럼, 어떤 일치감에 실려 흐르듯 읽었다고나 할까....... 아니 좀 더 팽창시킨다면, 팽창시켜서 사실은 좀 더 정확한 표현인데, 하염없이 읽었다는 게 맞습니다.
보통 남의 시를 읽으면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스르륵 열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좀 두드리면 안으로 활짝 열리면서 주인장이 웃음을 띠며 맞아주거나, 드물게는 와락 달려들 듯 밖으로 열리며 꿰뚫고 들어오지요. 그런데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의 경우는 그냥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거나, 아예 문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십 편을 그렇게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 이 시인이 나와 같은 묶이의 사람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답으로 떠올랐습니다. 모국어를 통해 드러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 또는 자세가 같은 게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턴가 저는 스스로 식물성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식물적 생명감각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식물에 대한 감수성, 친연성이 남다릅니다. 가령 한의원 개원할 때 축하용으로 받은 난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 대개 일 년 이내에 죽지요. 제 경우는 오년 지난 아직도 살아 있는 난이 있습니다. 단순히 관리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식물적이어서 제 곁의 식물들과 함께 생명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식물적 생명력의 본령은 "받아들임"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곳에서 그 생을 마쳐야 하므로 삶의 온갖 조건, 이른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동물은 조건을 박차고 옮겨 가면 그만입니다. 식물은 그럴 수 없지요.
시집의 제목이 된 시에서 시인은 그 "받아들임"의 흐름을 참으로 물처럼 유장하게 풀어냅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 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채워넣고
떠나라.
밑줄 그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시가 됩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말고 다른 것을 넣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핵심 내용인 그 부분을 제외했습니다. 가령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의 마지막 네 행,
.......
마음속에 한 여자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이 처절한 사실도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섭섭함 버리고 생각해보고, 중얼거려보고, 사랑하고, 길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텅 빈 수숫대처럼 온 몸에 바람소릴 채워 넣고 떠나야 합니다. 물론 수숫대는 바람소릴 채울 뿐 떠나진 못하지요. 사람이기에, 사람한테니까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 떠남은 바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의 절정 아니던가요.
3. 식물의 생명력은 이렇듯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받아들임"은 속성상 가림이 없습니다. 겨울도 받아들여야 하고 여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가림 없이 받아들이면 그 생명은 모순으로 차고 넘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정확하고도 풍요롭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모순의 공존, 저 도저한 역설의 삶으로 나아가는 자재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씁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기다릴수록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다시 기다림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것. 인생의 비대칭적 대칭.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무애(無碍). 시인은 마침내 식물적 생명감각을 완성합니다. "받아들임"이 공중제비 돌아 "꿰뚫음"과 만나는 뫼비우스 공간, 바로 그 푸른 지평선을 열어제친 것이지요.
4. 그 경계적 성취는 제게 이런 문학적 풍경화를 건네줍니다. 김재진은 정호승과 마종기의 경계다! 정호승은 수직으로 솟구치고 마종기는 수평에서 떠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김재진은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길어도 대부분 연 구분이 없습니다.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진의 생명감각이 그런 것이지요. 길어져도, 심지어 통속적으로 반복해도,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반대로 선문답 같이 칼에 베이듯 툭! 떨어지는 말도 's라인'을 그리지 않습니다. 산문과 운문이 서로 누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가 하염없이 읽어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은 그의 산문을 읽어보아야겠군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