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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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이와 맺는 관계는 흔히 특정한 환상 시나리오를 포함하며, 그녀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이 시나리오이다. 어머니는 이 환상의 도움으로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아이에게 있는 아이 이상의 것-대상a, 주체를 특징짓는 결여의 대역인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 시나리오를 만든다.·······

아이를·······파괴하는 것은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있는 당신 이상의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절단해 훼손한다.”·······

·······어떤 면에서 사랑에 빠지는 모든 행동에는 약간의 망상이 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첫 순간은 흔히 일종의 섬망으로 경험된다. 주체는 대타자를 과장하고 그 혹은 그녀를 대상a를 소유한 누군가로 인식한다.·······(206-207쪽)

·······어머니는 더는 아이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아이도 어머니의 사랑이 결코 없애주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겪어봐야 한다.(215쪽)


정신과의사인 프로이트에게 정신은 정신과적 분석 대상인 정신입니다. 라캉에게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상대방을 “절단해 훼손”하는 사랑이라면 라캉이 말하는 사랑 또한 그런 성격을 지닐 것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이다.’(『몰락의 에티카』654쪽)라는 신형철의 설명은 타당합니다. “환상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는 사람과 “섬망으로 경험”하는 “망상”인 살레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은 이런 것입니다.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은-인용자)·······반성 없는 흐름이(다.-인용자)·······욕망은 환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다음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발생한다.·······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정신분석의 영토 밖에 있습니다. 아니 이 사랑은 당최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라면 세상 모든 어머니가 바로 이 사랑을 할 법하지만 현실 어머니 사랑은 이 사랑과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림의 지점은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 체제는 치명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리사회 어머니 대부분이 자녀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여 망가뜨리는 논리가 바로 불의한 권력과 매판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의 직간접적인 교사敎唆에서 나옵니다. “다 너 잘되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목적은 오직 높은 자리에서 돈 많이 가지고 살다 천당 가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과정에서 남을 수탈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앎에도 행복의 이름으로 무시하며 넘어갑니다. 사랑으로 욕망을 은폐하듯 행복으로 범죄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하고자 할 때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진실을 훼손하는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어 우리사회는 공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멈추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도저한 현실 인식이 우선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현실 인식은 라캉 등의 난해하고 복잡한 이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석과 철학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세상에 와 닿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서구 천재들의 이론은 천착장애hyper-inquiry disorder라 불러야 할 정도의 극단적인 파고듦으로 말미암아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상에 적용되지 않는 위대한 이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이한 삶으로 이행되지 않는 난해한 분석은 과잉 진화된 대뇌전전두엽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 모호한 명료성을 드러내고 그에 맞게 하나하나 움직여가는 일입니다.


아이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보려면 질문하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내가 지금 아이를 사랑하는 게 맞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대답했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아이가 내 사랑을 사랑이라 느끼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는 답을 들으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와 아이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를 때 누가 포기할 것인지 말입니다. 설혹 아이의 생각이 틀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 안음으로써 아이와 나의 불연속을 인정하고 결과를 수용할 때 비로소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애지중지 학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자기 탐욕의 대행자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거르기를 빠져나간 것은 이미 정신병 단계입니다. 사랑을 논하기에 앞서 치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마 우리사회 상당수 어머니가 이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병식 없이 소리 없이 제 자식을 죽이고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세월호사건의 또 다른 배후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사건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지겹다, 시체장사다, 빨갱이다·······소리가 나옵니다. 그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으므로 진실은 은폐됩니다. 그들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므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인데.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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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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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양육과 관련한 불안을 목격하고 있다. 이 불안은 자녀를 기르고 그들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최상의 방법에 대한 어떤 합의도 더는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부모들은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과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껴 왔고, 이는 무수한 저자들이 양육을 지도하는 책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조언들은 대개 서로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다.(179쪽)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실은 중학생 때 저와 치유상담을 진행하다가 그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던 아이입니다. 그 때 찾아온 까닭은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까닭 또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한층 더 격렬해진 아이는 때로는 가슴을 치며 때로는 온몸을 떨며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녀양육법을 가르치는 나름대로 유명한 강사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어떤 내용을 강의하는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인 한 근본적으로 흠을 지니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기 확신에 맞아 시퍼렇게 멍이든 자기 아이가 다른 상담자, 그것도 자기가 금지한 상담자를 2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어머니를 가르치는 이 어머니의 비극에 대하여 삼가 극진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할 따름입니다.


저도 아비입니다. 우리가 범속한 부모로서 한 시대의 뒷자락, 이 사회의 변두리를 떠돌며 자녀 양육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부正否·승패勝敗를 떠나 그 자체로 불운이며 불행입니다. 원하지 않은 삶의 조건에 휘말렸으니 불운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녀 양육이 각자 해결할 문제로 변해버린 근대 이후를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맑은 행복에 깃들 수 없으니 불행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명령하는 매뉴얼을 따르면 그대로 인간파멸이고 중용을 따르면 극심한 불편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시공은 이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판이어서 불안 증폭의 기울기가 가파르기 그지없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약탈구조를 이끌어온 매판 지배집단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미증유의 살해와 착취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속한 부모로서 우리는 대부분 대박을 꿈꾸며 자녀를 다그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의 지속성이 강화되어 생사 차원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든 책이든 강의든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자녀 양육법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지도가 성공하는 예는 드뭅니다.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녀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식 부모 편견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 양육의 문제가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아니고 내 자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과연 내 자녀는 어떤 삶을 살면 행복해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자세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쉬울 리 없습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쪽박의 증거가 되는 대한민국이니까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래도 우리는 새끼들이 살아 있으니 이런 고민의 고민에라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때같은 새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걸 목도하고서도 왜 죽였는지 알 수조차 없는 부모들 앞에서 이것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진 고민 아니던가요. 죽음의 하루하루가 쌓여 470일이 된 어느 날 욕먹고 뺨 맞은 부모 앞에서 차마 변명 못할 고민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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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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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흔히 연애 문제에 대해·······강박적 의례들과 스스로 부과한 규칙들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여성은 상대 남성에게 자신이 어떤 대상인지에 관한 난제에 부딪힐 때 연애를 거부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우울하고 무관심한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사랑받지 못했음을 깨닫거나 자신이 더는, 남성의 연애 환상을 형성하는 중심인 대상a가 아님을 인정할 때 흔히 체념의 몸짓을 보인다.(165쪽)


서구의 뜨르르한 ‘지식’을 대하다 보면 한 순간 어이없어지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겪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적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실수 아닌 실패를 하는 것일 테지요. 문명적 패권과 진실의 보편성을 혼동한 결과입니다. 민속학적 수준의 관찰을 여과 없이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미 익숙한 풍경입니다. 라캉이 강박 이야기를 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를 들먹인 것이 그 예입니다. 규범적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데 엉성한 우발적 예시로 치밀한 구성적 열거를 대체하는 것도 상습화된 전략입니다. 여기 본문의 히스테리(신경증)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히스테리신경증을, 정신적 에너지가 육체적 증상으로 바뀌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미국 정신의학 협회의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5>는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라고 이름 합니다. 전환장애라는 이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의미 함축은 본질을 꿰뚫은 것이 아닙니다. 본질을 놓치다보니 일시적 기억 상실, 의식 소실, 마비와 같은 증상들을 “우울하고 무관심한 상태”나 “체념의 몸짓”이라는 부정확한 표현의 예시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환장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강박장애와 비대칭적 대칭 관계에 있다는 진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통찰이 없기 때문에 자꾸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는 어떤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떨쳐버리고 싶은데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라고 흔히 정의됩니다. 이 정의도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강박장애는 변화에 대한 불안의 병리적 처리 반응입니다.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을 강고하게 붙잡음으로써 변화가 몰고 올 위험을 막으려는 방어 작용입니다. 이와 반대로 전환장애는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이 지니는 인과구조나 필연적 알고리즘에 대한 불안의 병리적 처리 반응입니다.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에서 비인과적으로 갑자기 이탈함으로써 현실 고착이 몰고 올 위험을 피하려는 방어 작용입니다. 전환은 강박의 상대어입니다. 정신적 에너지가 육체적 증상으로 바뀌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기억상실이나 의식 소실과 같이 육체 증상이라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전환장애라는 말은 잘못 쓰이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진실에 부합하는 이상한 용어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부장적 사고의 유제를 불식시키지 않은 냄새가 나지만 저자가 강박과 히스테리를 남녀에 각각 연계한 것은 역학疫學적으로는 물론 뇌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의 지평에서 보더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박은 좌뇌형 이성주의 지배체제의 보수 계략에 가 닿습니다. 전환은 우뇌형 감성주의 양육체제의 혁신 운동에 가 닿습니다. 질병으로서 강박장애, 전환장애의 진단과 치료도 이런 광폭 시각에서 전면 재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전환장애에 대한 남성가부장의학의 굴절된 시선부터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진실을 세우기 위한 본격 연구를 이제 시작해야 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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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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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어머니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가 늘 곁에 있는 것·······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대상들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어머니가 늘 아이 곁에 있어 숨 막히게 하면 아이에게는 욕망이 발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늘 곁에 있어 생기는 불안은 바로 아이가 결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35쪽)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딸은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그렇게 숨 막힐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우연한 기회를 타고 엄마한테서 도망쳤습니다. 10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 지나면서 딸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20대 중반 돌아온 딸은 어머니와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은 10년 전보다 더욱 울울한 불안을 몰고 왔습니다. 어머니의 일방적·폭력적 변화를 예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측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의 무방비성이 지닌 막막함을 더욱 날카롭게 감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상담했던 한 젊은 여성의 말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유학 보내 죽기 살기로 일해서 공부시켰다며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라캉과 라캉주의자들은 집요하게 불안을 결여 여부와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은 무엇이 있거나 없는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정서가 아닙니다. 있거나 없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어날 가능성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을 예상할 때 생명 감각이 발동시키는 경계의 신호가 불안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유지와 고양을 향한 욕망의 위축·단절을 막기 위한 방어 작용입니다.


불안의 통시通時적 축은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의 변화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불안의 공시共時적 축은 분리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자타의 분리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이러한 불안의 생리적 작용과 구조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난삽한 개념 유희를 전시하는 것은 불안이 전하는 소식을 통해 삶을 건강하게 영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 시공의 축을 따라 나타나는 각종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꾸짖음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독임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각성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소한 오늘의 분별지를 지니고 겹과 결을 넘나들며 살아보지 않은 채 거대한 영원의 무분별지를 말하는 것은 물색없는 허영입니다.


세상에서 다시없는 사랑을 지닌 어미라고 스스로 생각한 어머니가 딸의 인생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닫기까지는 아직 남은 날이 많습니다. 하지만 딸이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뒤 어머니는 문득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위해서입니다. 딸도 그 기미를 느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딸과 어머니가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딸이 흉흉한 소문 아닌 노문 놓기로서 불안을 삶의 소중한 일부로 끌어안을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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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all Me Inspirational: A Disabled Feminist Talks Back (Paperback)
Harilyn Rousso / Temple Univ Pr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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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정희진의 글을 읽고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독서는 매우 천천히 띄엄띄엄 이루어졌습니다.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지 않는 글 솜씨에서 나온 글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는 먹물 티내는 글에 익숙해온 터라 처음부터 바싹 다가들어 읽지 못하였습니다. 느슨하게 읽어 가다가 뒷부분 어디쯤부터 속도가 빨라지고 독서 지속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은 가야금산조 휘모리장단으로 들었습니다.

 

1. 마침 라캉주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읽으면서 주해 리뷰를 쓰는 중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정반대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책입니다. 해릴린 루소를 다 읽고 난 뒤 든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라캉 같은 천재의 난해한 이론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애 여성으로서 산 삶과 거기서 배어나오고 거기로 배어든 생각들을 쉽게 정직하게 쓴 글을 읽으며 받는 감동이 라캉의 고도한 사유의 겹과 결을 뒤적이며 맛보는 충일감보다 훨씬 더 휴먼스케일에 가까웠습니다. 높고 깊고 넓은 인문 지식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걸음 앞을 보아서 한 걸음 나아는 것이 인간의 변화입니다.

 

2. 저자 스스로 이 책을 콜라주라 했듯 자유분방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랄 것도 없는 구조입니다만 마지막 여섯 장은 가히 일품입니다. 이 부분만 떼어 읽어도 저자가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맨 마지막 세 장은 천하의 명품 코다coda입니다.

 

나의 비장애인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괴물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장애인 자아에게 바치는 글

 

비장애인 자아는 이상理想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비장애인은 정상인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괴물 자아는 저주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장애인은 비정상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널을 뛰며 살았습니다. 흔쾌히 인정하고 흔쾌히 떠나보냅니다. 남은 것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실재, 장애인 자아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딱 100점짜리 자아입니다. 정상인이 100점짜리 자아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상인은 당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온몸으로 온 삶으로 깨달은 그 진실을 이렇게 나지막한 우뚝함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든 몸뚱이야, 넌 내게 참 잘해줬어. 내가 너에게 한 것보다 훨씬 자비롭게 나를 대해줬어. 우리 둘 중에 네가 더 품위 있고 더 지혜롭구나. 네가 나를 품어주었듯이 이제 나도 너를 품어주고 볼품없는 움직임을 한계가 아닌 생명의 신호로 받아들일게.”

 

3. 저자는 이 깨달음을 실어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라고 일갈했지만 정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은이가 몹시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우리가 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나도 눈물이 나려 한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시시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일 수도 있고 비장애인일수도 있습니다.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비장애인이면서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시한 우리입니다. 이제 눈물이 나려 하십니까?

 

4. 장애는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인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를 몸의 장애인처럼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울장애를 지닌 사람을 우울증 환자라고 부르는 것과 뇌성마비를 지닌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립니다. 본질은 동일합니다. 마음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괴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널을 뜁니다. 그들에게도 치유의 외길은 자신의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실제로 마음의 문제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 국민국가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문제입니다. 통계에 잡힌 것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 인구 10% 이상이 마음의 장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0. 오늘도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떤 분과 긴 시간 상담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장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간곡히 권했습니다. 너나없이 그게 잘 안 되는 이 ‘시시함’에 함께 서서 붙들고 울어보실까요?

 

* 도서 검색에 번역본이 뜨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원서 를 올렸습니다. 번역본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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