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의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마음병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그러지고 덜거덕거린다. 일상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치유 상담도 잘 흘러가지 않는다.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을 도무지 병으로 인식하지 않는 무감한 통념에 붙잡혀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을 특별한 병으로 인식하는 무거운 신파에 휘감겨 있다. 전혀 다른 모습의 정신 네오테니neoteny에 빠진 상태다. 모른 채 집착하는 전자는 지둔함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알면서 집착하는 후자는 잔망스러움의 냄새를 풍긴다. 치유가 어렵다는 면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둘 다 치유가 잘 안 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성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자신이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자신은 자신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본다. 객관적 시선은 집착의 덜미를 낚아채는 맑은 관점에 설 때 잡힌다. 맑은 관점에 서는 일은 결가부좌 참선이나 명상 따위로는 어림없다. 고통 받는 다른 생명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실상에 유념해야만 가능하다. 유념은 공감과 참여를 낳는다. 공감하고 참여함으로써 고통은 네트워킹이 된다. 네트워킹이 바로 무한히 번져가는 신의 파동이다. 신의 파동에 주파수를 맞추면 병은 알맞게 해소되고 삶은 알맞게 해방된다.


일요일에 영화 <1987>을 보았다.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그때 대학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아내는 아내대로, 아내 또래를 제자로 둔 나는 나대로 역사 앞에 소환되었다. 내게는 영화의 어떤 핵심 이미지와 소리들이 거듭해서 세월호사건과 포개져 다가와 눈물의 온도를 바싹 끌어올려주었다. 세월호사건 직후 한의원이 갑자기 한산해졌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려고 누우니 몇 주간 지속되어왔던 몸의 통증이 한결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이 밤은 통증 때문에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잘 수 있겠구나, 생명의 감수성에 신뢰를 보내며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몸의 통증은 전에 없이 격심했다. 마음의 홀가분함은 전에 없이 깔끔했다.


앞의 20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본다면 어찌 반응할까? 추정건대 무감한 통념의 사람은 재미없어 중간에 졸 가능성이 높다. 제 또래 두 학생의 죽음에 서린 문제를 문제로 독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거운 신파의 사람은 제 고통의 덫에 걸려 저 고통의 순간들을 외면할 것이다. 제 또래 두 학생의 죽음에 서린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공통된 것으로 독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채우듯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음”(246쪽)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양육은 불가능하다. 양육은 인생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기획 치유다. 치유 기획은 직립보행이 야기한 그늘의 보정으로 병을 고안해낸 동시적 네트워킹의 핵심 갈래다. 병을 통해 무한신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은 실로 지상의 축복이다. 아파서 아름다운 이여, 그대는 이미 너무도 아름답다. <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22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3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