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개의 곡절을 더듬었다. 그 가운데 23개가 내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았으니 이들을 일러 실패라 해야 할 것이다. 여섯 가운데 둘을 실패라고 고백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자랑스럽지 않기에 차마 내장을 드러내듯 톺아보았다. 그래도 실패하지 않는 이야기가 40개나 있다는 것에 은근히 웃을 수조차 없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에 도무지 ‘성공’이란 표현을 쓰기가 송구하기 때문이다. ‘성공’은 없다. 찰나마다 확인하는 해방의 성취가 있을 따름이다.


아주 잘나가는 한의사 후배가 어느 날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형님, 재미있으세요?”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재미있어.”


그 또한 주저 없이 내 대답에 응했다.


“저는 재미없습니다.”


그는 이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재미있으신데요?”


나는 이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으로 들어왔다, 사는가 싶게 사는 사람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잖아.”


그가 재미없는 까닭은 그의 의료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는 까닭은 내 의료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병을 상담·숙담으로 치유하고, 더 나아가 실생활의 난제를 숙의로 풀어냄으로써 환우와 함께 삶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물론 근원적으로 아프고 슬프다. 그 어둠을 통과해 빛으로 가는 삶의 과정이 보람 있으니 ‘재미있다’ 단언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빚어낸 이야기는 그러나 그러므로 베스트셀러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제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사회의 베스트셀러 등 뒤에서 벌어지는 통속한 음모가 이 이야기에 들어설 여지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다. 오직 나눈 사람 각자의 삶에서 소리 소문 없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갈 뿐이다.


내 진료 이야기가 그러하듯 내 인생 이야기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다. 인생 이야기가 베스트셀러로 되려면 승리나 기획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내 인생은 패배와 방치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신음소리, 치유의 웅얼거림이 뒤엉킨 이야기가 조증mania 숭배하는 이 사회에서 왁자하게 소비될 리 없다.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만이 소리 소문 없이 정독하고 재독할 뿐이다.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이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내가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는 포개지고 또는 쪼개지며 서로의 이야기들은 엮이고 기억된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즉시 사라지는 운명, 그 베스트셀러의 천형은 우리가 짊어질 바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내버리는 삿된 힘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줄기차게 번져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끈덕지게 이루어가야 할 숙의 문명이다. <끝>


* 글 일부를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리뷰 <0.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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