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치료 상담 받았던 ***입니다.

치료 상담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의 글을 남깁니다.


머리 자르고, 모자 쓰고, 선생님 뵀을 때, 생각나네요.

여전히 저의 상황이 나아진 건 없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더 깊게 남았지만,

이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거 같아요.

우울증과 쇼크의 시간들을 지내고 나니, 이제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어지러워서 동네 한의원에 갔더니, 체질이 그렇다 하네요.

심각한 건 아니고요.


아무튼 선생님, 그때 너무 감사했습니다.

제 유서가 아직도 선생님께 진료기록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네요.

건강하시고요.

나중에 상담하러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숙의한 지 6년도 더 지난 어느 날, 한 청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저와 딱 두 번 숙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짧은 만남에서 나름의 시절인연을 이룬 셈입니다.


숙의하러 찾아왔을 때, 그가 편지에 썼듯 유서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좀 더 따뜻한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엄마의 억압과 통제를 벗어난 세상,

아빠의 알코올중독과 폭력(에서 자유로운 세상),

언니와 비교되지 않는 세상,

(이런 일들)·······로 인한 저의 우울증을 치유해주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는 없습니다.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지만 좋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괄호 안 내용 보충, 구문 순서 조정-필자)


뭐 더 긴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할 수 없을 만큼 그 곡절이 간파되는 압축입니다. 단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린다면 어머니의 억압과 통제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평신도 직급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거대교회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교회 활동하느라 어머니는 늘 집을 비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에게 신앙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끌려가듯 교회 나가, 기도하며 흘린 눈물은 모두 우울증으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를 피해 개신교중독이 된 어머니가 그를 중증 우울장애로 몰아넣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적반하장은 ‘네가 우울증에 걸린 것은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해서 교회를 등졌기 때문이다.’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어둠까지도, 해석·평가 없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삶을 바꾸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까닭은 받아들이지 않고 바꾸려 하기 때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바꾸려 하는 것은 문제를 모른 채 답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틔워주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단 두 번의 숙의에서 변화의 틈을 냈다면 바로 이 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꾸려면 받아들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