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하라 요시토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포유류 가운데 청각우위뇌형이라고 한다. 듣는 인간homo auditus인 것이다. 말하는 인간homo narrans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진실이다. 들어 소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한 말인들 무슨 소용이랴. 언어 진화 자체도 구강을 포함한 발성 기관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정확히 듣는 청각기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듣기 사건은 말하기 사건에 선행한다. 아기는 엄마에게서 들려오는 모(국)어를 듣고 그때로 따라 함으로써 말의 세계에 들어선다. 듣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이런 차서의 이치는 비단 생애 초기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은 먼저 듣고 나중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남은 다수고 나는 단수다. 나는 남 속에 있다.


인간이 말을 발달시켜온 까닭도 남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말하기 자체의 능력에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젬병이다. 남들이 잘 알아듣도록 말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잘 들어야 한다. 듣는 능력 뛰어난 사람이 말 못 하는 법은 없다. 말은 귀 사건이다.


청각은 기능을 넘어 자세다. 청각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일은 개인 건강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소통과 공존을 향한 열린 자세의 표지다. 백색문명은 청각에서 자세를 누락시켰다. 백색 학문과 문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 포르노를 쏟아낸다. 백색 음악은 8hz 지구 조화 장場과 불화하는 괴벨스의 440hz를 연주한다. 백색청각은 소통 아닌 소비만을 향해 속절없이 열린다.


수탈적 소비를 향해 열린 청각은 막무가내 확증 편향으로 진실의 문을 닫는다. 듣고자 하는 것만 듣는다. 그리 들은 것만 진리라 우긴다. 우기는 것을 우월의 증표로 삼는다. 증표 받고 떡고물 떨어뜨려주는 백색언어세력이 1500년 동안 떠들어온 나라가 여기 있다.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고 백성이 기어이 그 수괴의 멱을 딴 나라가 또 여기 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가만히 녹색 귀를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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