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코의 의학-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중심으로-


생명의 표면이자 심연, 중심이자 경계인 코.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코도 병들 수 있다. 코가 병들면 어떻게 병들까? 코가 병들면 어떻게 치료할까? 이 문제가 의학이 코에 관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근간이다.


흔히 겪는 일이니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나는 30대 중반에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걸려 15년 가까이 고생했다. 그 때는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었으므로 감기몸살· 축농증· 알레르기비염 등의 잘못된 진단을 믿고 온갖 곳을 전전했다. 서구의학 방식은 수술 빼놓고는 다 해보았다. 코 질환의 명의라고 책에 소개된 한의사도 세 사람이나 찾아가 치료를 받았다. 그 긴 세월 동안 내 코는 그야말로 콧대를 높이 세우고 아픈 상태에서 요지부동이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겉보기로는 알레르기비염과 비슷하다.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코피·가려움·미열·두통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는 눈과 귀로 염증과 가려움이 번진다. 주의력· 집중력· 기억력도 떨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 오래 계속되면 수면장애가 뒤따른다. 심리적인 면에도 영향을 미쳐 불안이나 우울로 번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병이지만, 겪는 당사자에게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 40대 중반, 극에 달한 이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끌어안고 나는 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대에서도 이런 저런 치료를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본과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참고삼아 읽으려고 사두었던, 지정 교과서 아닌 양방병리학 책을 읽다가 벼락같은 한 문장을 만났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대개 슬픔·원망 등의 감정 요인이 작동하므로 심리치료 말고는 현재 의학의 수준에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제야 저는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왜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즉시 나는 실천에 옮겼다. 애써 다른 전문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리 상담을 진행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두움 속에서 침묵과 절규를 가로지르며 극진히 자기 대화 나누기를 서너 시간, 이윽고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문득,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가려움·미열·두통 등의 증상들이 아침 해 뜨면 물안개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내 소름 돋는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다. “아, 병은 이제 없구나!” 그렇다. 그것으로 내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다.


임상 현실에서는 양의든 한의든 대부분 알레르기비염과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의자醫者들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의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내 경험을 토대로 진단 과정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인가, 아닌가를 면밀하게 살핀다. 당연히 치료 방법도 달리한다.


거꾸로 접근하는 진료도 반드시 한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 우울장애일 경우는 이 진단을 빠뜨릴 수 없다. 문진과 경추압진頸椎壓診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진단 방식을 하면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매우 높은 연관성을 지닌다. 아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혈통’이 같은 병이다. 기억 속에 저장된 아픈 감정을 되살려내어 마음의 장애를 유발·지속·증폭시키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따로 생각하면서 시달려 온 전형적인 예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자기 상담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료한 것은 결국 우울장애의 치료를 겸한 것이었다. (이전 4문단 내용은 마이페이퍼 『수군대지 말고 숙의해요』(52) 일부를 가져옴.)


혈관운동신경성비염과 우울장애의 연관성 이야기를 지나치리만큼 자세히 언급한 것은 이 문제가 코에 이끌리는 진실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말고도 코를 둘러싼 의학의 곡절曲折은 가히 전全방위적이라 할 수 있다. 코는 기왕에 말한 것 외에 뇌와 척수의 경막, 송과선, 접형골, 설골, 입 바닥 격막, 미주신경(부교감신경), 안면신경, 삼차신경, 턱관절, 횡격막, 부신, 요추4번, 회맹판, 후경골근, 엄지발가락, 발바닥 궁 등 별의별 것들과 직간접적으로 오지랖 넓은 관련을 맺고 있다. 코는 이렇게 정신-신경-면역-내분비계 전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코가 병들면 생명 전체가 병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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