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이 후진 대접을 받아온 까닭은 후미진 틈바구니까지 스며드는 소미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것, 아니, 아니 그래서 ‘여자’의 감각으로 치부하여, 앞에서는 아득히 경원하지만, 뒤에서는 드잡이판 벌이는 남성 백색문명의 압제·수탈 대상이 다름 아닌 후각이다.

 

후각의 복원은 그 어떤 혁명보다 래디컬하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반-문명이며, 비-교양이며, 몰-품위며, 탈-인류인가 말이다. 큼큼대다니. 그러나 그래서 큼큼대라. 큼큼대야 생명의 근원에는 냄새가 있다는 진리를 깨친다. 그 냄새가, 바로, 녹색 냄새다.

 

녹색 냄새는 비리꼬리하다.

 

녹색 냄새를 맡아 ‘들이는’ 비리꼬리 후각 감각은, 그러면 어디서 날까? 스스로 냄새의 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맡아도 들이지 못한다. 녹색 후각은 공현이며 공감이다. 자신이 근원적으로 비리꼬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녹색 후각을 지닌 인간은 녹색 체취를 풍긴다. 녹색 체취 풍기는 인간은 자신을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한다.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되는 인간에서만 후각은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후각 해방을 위해 코를 우뚝 깃발로 세운다. 코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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