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가 식민지, 분단과 전쟁, 독재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배층의 계략에 따라 피지배층은 단세포적 삶으로 끝없이 내몰렸습니다. 돈과 힘 빼고는 다른 어떤 가치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살아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잘 나가는’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깁니다. 돈 안 되는 일에는 ‘그 뻘짓 왜 하느냐?’ 말고 할 말을 잃은 야차로 희희낙락합니다.


똑똑해서 인생이 술술 풀리는 사람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사던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공황 뒤엔 우울이 덮쳐왔습니다. 영문을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가족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긴급한 상황인데도 전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삶의 길목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한 노력에 비해 일이 잘, 그것도 아주 잘 풀려왔음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거의 한 번도 위기에 봉착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마치 섭리처럼 흘러갔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가족의 결정적 보우가 있었습니다. 가족의 보우는 약도 되고 독도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독의 날에 베어진 것입니다.


가족의 강권으로 상담을 하긴 하는데 여전히 그는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뭐가 돼도 되겠지 하는 유아기적 사고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질문하면 그 즉시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는데 대부분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나머지는 피상적인 답변이었습니다. 이야기 주제를 제시하고 준비해오라 해도 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책을 추천하고 읽어오라 해도 머리 긁적이며 넘어갔습니다. 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가족의 걱정이 수그러들자 상담 예약에 아랑곳없이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필경 그는 전과 같이 ‘자알~’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번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가 오거나 자신의 문제를 문제 삼게 되지 않는 한, 무심중에 살아가는 삶을 지속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저 찰스 슐츠가 말한바 ‘인생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 그냥 나는 행복하다.’ 정도로 달관했다면 말입니다.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2년가량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그는 앉자마자 스스로 입을 열었습니다.


“별로 아는 게 없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우울증 상태인 듯합니다.”


그가 예시하는 증상들은 틀림없이 우울장애의 전형적인 표지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중대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판단도 선택도 실행도 모두 어려웠습니다.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하나, 여태까지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제이며 그 앞에 마주설 주체는 오직 자신뿐임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제 딸아이 어렸을 때 잠 깨우던 방법을 말해주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시각 4-5분 전에 딸아이 방으로 조용히 들어갑니다. 귓속말로 다정하게 별명을 부릅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합니다. ‘3분 57초 동안 뒹굴뒹굴!’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뭘 해야 한다는 당위 의식을 내려놓습니다. 현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망가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심리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딱 사흘 동안 뒹굴뒹굴할 여유를 스스로에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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