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는 무시간적 진리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다. 논리는 문명현상, 무엇보다 정치현상이다. 사하라시아 타락-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의 결과로 종양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그리스의 거대성공증후군이 만들어낸 논리가 바로 형식논리다. 타락이 거대왕국을 낳고, 거대왕국이 거대(유일)신을 낳고, 거대(유일)신이 거대이론을 낳고, 거대이론이 자기 정당성의 영속화를 위해 종자논리dialecticum semen를 만든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가 만든 종자논리인 형식논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른바 동위원리에 포함된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다. 모순율, 배중률은 동일률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결국은 동일률이다. 동일률은 A=A다. A=A는 동어반복tautology이다. 동어반복은 항상 옳다. 항상 옳아서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나마나 한 말이므로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다. 이런 진술을, 타락한 인류는 불변하는 진리의 기틀로 삼았지만 참된 진리에 터해 보면 이 말은 병적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병적 방어기제를 넘어 범죄에까지 이른다. 간결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자기성찰 불능: 내 거점만 남기고我 남의 거점을 지운다無我.

(2) 자기변화 불능: 내 안정常을 붙박고 남을 불안無常으로 흔든다.

(3) 자기절제 불능: 내 즐거움樂을 더하려 남을 괴로움苦에 빠뜨린다.

(4) 흠 없(다고 망상하)는 체계narrative를 공고히 구축한다.


최근 밝혀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winner 또는 CEO의 대뇌는 안와전두엽에 손상(에 가까운 변성)을 겪는다고 한다. 대뇌 안와전두엽에 손상을 입으면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자기성찰을 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의 비판을 귀담아 듣지 못 한다. 독선으로 치닫는다. “나는 나다, 나만 나다, 나만 옳다, 나의 옳음은 영원하다, 내 앞에 너는 무릎 꿇어야 한다, 이게 진리다, 끝.” 개인 차원의 거대성공증후군을 사회·문명 차원으로 확대하면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지배층 엘리트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형식논리가 인류 역사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즉각 알 수 있다. 전쟁, 계급질서, 여성차별, 아동학대, 몸의 분리, 거대유일신교, 시간 지배, 자연 착취. 이 모든 악의 근원에 질병 본질을 지닌 형식논리가 똬리 틀고 앉았다.


이 엄혹하고 육중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하면 종자논리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종자논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형식논리를 깨뜨리고 모순과 모호함을 품어 안는 다치多値논리(, 원효 식으로는 화쟁 논리, 내 식으로는 비대칭의 대칭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를 바꾸면 사유가 바뀐다. 사유를 바꾸면 삶이 바뀐다. 삶을 바꾸려면 대박의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안와 전두엽의 손상을 막아야 한다. 인욕을 넘어 진욕進辱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욕은 소미심심의 연대를 낳는다. 소미심심의 연대가 인류를 파멸에서 구할 것이다. 이 화두를 거대유일신교를 극복한 예수 내러티브로 풀어본다.


나는 지난 8월 18일 마이페이퍼 <누가 참된 장엄신인가?>를 통해 창조신에서 욥을 거쳐 예수에 이르러, 어떻게 거대신이 해체되고 소미심심 신이 되는지를 일별했다. 여기서는 특별히 2천년 동안 미궁 또는 오류에 빠져 있었던 예수 부활 사건 해석을 새로운 종자논리로 바꿈으로써 기독교와 인류 전체의 활로를 모색해보겠다.


전통적인 예수 부활 이해에 따르면, 그것은 당연히 죽음을 이긴 승리다. 그 승리가 없으면, 예수 구원의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이 미완성이면, 기독교인의 신앙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 당연하고도 위대한 반전은, 그러나 틀렸다. 거대유일신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부활은 거대유일신의 형식논리 안에서 부리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온 목적과 그에 걸맞은 과정의 실재는 오직 거대유일신을 벗어던지는 길로 향한다. 거대유일신은 타락이 빚어낸 가짜 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참된 신의 거대유일신 벗어던지기는, 거대유일신의 ‘망상이지만 강고한’ 존재 거점을 지우는 일이다. 예수의 태어남과 삶의 전 과정은 그 거점 지우기다. 외양간에서 태어나 세리와 창기를 더불어 살았으니 말이다. 예수의 죽음은 좀 더 확실하고 충격적인 거점 지우기다. 영원하신 거대유일신이 죽다니. 마침내, 부활은 거점 지우기의 ‘완전’ 완성이다. 시신마저 지운다. 무덤마저 지운다. 아, 그리고 이, 이 한 문장!


“나를 만지지 마라.”


이 말은 부활을 통해 신이 다시 ‘영적’ 존재를 회복했다는 개소리가 아니다. 만짐, 붙잡음으로 남을 최후의 거점마저 지우는, 도저한 반성이다. 신이 참 신일 수 있는 마지막 결단이다. 신이 스스로 無를 만들어, 無神을 거쳐, 無限神을 연 궁극의 창조다. 무한신은 스스로 존재 거점을 지운 소미심심의 벌레, 풀, 박테리아, 이끼들의 보이지 않아서 보는, 들리지 않아서 듣는, 맛보아지지 않아서 맛보는, 맡아지지 않아서 맡는, 닿아지지 않아서 닿는 온갖 생명 감각 자체이자 대상이다. 이 감각 자체이자 대상을 단박에 이루는 단 하나의 길은 거대유일신의 마지막 거점을 만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그 닿지 않는 닿음, 비대칭의 대칭에서 거대유일신은 홀연히 사라진다. 거대유일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무신의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은 서구 지성의 가소로운 한계일 뿐이다. 소미신과 소미신의 네트워크인 무한신의 비대칭적 대칭으로 세계 진리는 재편된다.


무한신은 실체 없는 실재다.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미신은 실재하는 시간실체다. 무시간 실체는 본디 없다. 실체 없는 실재와 시간실체 사이 비대칭의 대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총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예수의 ἐγώ εἰμί(I am) assertion의 장엄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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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2017-08-2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나를 만지지 마라>의 서평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ari_che 2017-08-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ㅎ

실은 장-뤽 낭시의 그 책을 비판적으로 읽은 결과,
나온 통찰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