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한가한 오후 전화벨이 울립니다. 간호사가 뭐라 뭐라 통화하더니 “원장님, 내일 오후 5시, 우울증 상담 예약 잡혔습니다.” 합니다. 메모하고 30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립니다. 보통 때는 그러지 않는데 홀연히 제가 먼저 수화기를 듭니다. 마음 치료를 오래 하다보면 생기는 직감이지요.


“저기요, 조금 아까 예약한 사람인데요. 나중에 다시 하려고요·······.”


우울증 환자가 이러는 경우, 비일비재합니다. 공감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죄송하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 하는 지극히 짧은 시간,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오시기 쉽지 않다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괜찮습니다.”


40분쯤 뒤 한의원 문이 열립니다. 바로, 그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 다음 예약을 잡기 위한 영업적 멘트를 날립니다. 훈련 받지 않은 직원이면 ‘네, 그러세요.’ 정도로 시큰둥하게 끊습니다. 물론 두 경우 다 환자는 오지 않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사람이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겠구나, 했어요.”


이게 뭐, 절정고수의 초식인가요? 아닙니다. 그저, 그대의 마음에 공감합니다, 정도의 평범한 표현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정도 공감조차 못 하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마음병 치료한답시고 나선 이른바 전문의들이 공감은커녕 되도 않는 분석에다 ‘지적 질’이나 하고, 약 몇 알 떨어뜨려주는 짓을 하면서 ‘공감 따위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느냐?’ 훈계하지 않습니까.


그는 유난히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을 지녔습니다. 그 큰 눈망울에서 쏟아내는 눈물은 제가 통째 내밀어주는 화장지 박스가 다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상담을 끝내고 나간 자리 바닥에는 똘똘 말린 화장지 조각들이 봄날 아카시아 낙화처럼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순응적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말마다 크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습니다. 동시에 “네. 네. 네. 네.”를 재빨리 반복했습니다. 1년가량 아픔과 삶을 숙의 과정에서 고개 끄덕임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만큼 작아졌습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거절하고 싸우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네. 네. 네. 네.”는 “네. 네. 네.”로, “네. 네. 네.”는 “네. 네.”로 “네. 네.”는 “네.”로 줄어들었습니다. 급기야 그 “네.”는 “.......”로까지 줄어들었습니다. 본인은 미처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는 어린아이마냥 신기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순응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그의 인생 40여 년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1기는 어머니 시대. 이 시기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만들어간 시기입니다. 어머니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고 관리했습니다. 어떤 이의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생각과 행동은 오류 없는 신의 사랑과 같은 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칭칭 묶여 온 영혼이 검푸르게 멍들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시시콜콜 그를 조종하려고 들며 끝마무리는 늘 이렇습니다.


“얘, 그렇지 않니?”


물음표가 있다고 해서 이 문장이 의문문인 것은 아닙니다. 동의 구하기를 가장한 명령,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해!”가 포함된 허위의문문입니다. 언젠가 그 어머니가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제게도 똑같은 의문문을 구사했습니다.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가 당혹스러워하며 문맥을 끊지 못하는 사이 제가 먼저 저의 맺음말로 문맥을 끊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 비법(!)을 전수해주었습니다.


“맨 마지막 말을 그대가 함으로써 대화 자체는 물론 그 맥락 끊기의 주도권을 잡으세요.”


제1기 어머니 시대에 그는 단 한 번도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머니의 “얘, 그렇지 않니?”에 따라 피아노를 배우고 학교를 가고 전공을 정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몸 안에는 그의 영혼이 없었습니다. 그 존재론적 공백, 부재는 단단한 자기부정증후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기부정증후군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그는 저에게 비로소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제2기는 배우자 시대. 그에게 배우자는 대체된 어머니였습니다. 배우자는 그와 마음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도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삶을 왜 선택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우자의 그런 뜻과 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맥락, 처음과 끝은 언제나 배우자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그가 없었습니다. 그의 자기부정증후군은 한껏 증폭되었습니다.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는 임계점에서 어찌 어찌 발견한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함께 독립전쟁 시작해볼까요?”


어머니한테서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치유의 핵심임을 알려주자 그는 수긍하면서도 거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머니와 하나라고 생각하며 40여 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다른 생각, 다른 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은 당연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러보세요.”


그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떴습니다. 40년 동안 엄마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어머니라고 쉽게 불러질 리 없습니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이 독립선언의 순간입니다.”


잠시 후 그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2채널the 2nd channel’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2채널을 통해 연속의 세계에서 단절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연속은 억압입니다. ‘엄마’라는 이름입니다. 단절은 자유입니다. ‘어머니’라는 새 이름입니다. 세계를 바꿀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머니’라고 힘들게 이름을 바꾼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그대와 엄마 사이에 금이 그어졌나요?”


그의 눈이 빛났습니다. ‘어머니’에서 시작하여 그는 저와 함께 독립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모든 말에 경어를, 모든 문장에 문어를, 모든 대화에 치밀한 수사학을 장착하고 예의바르되 단호하게 어머니 앞에 섭니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결정타가 바로, 조금 아까 말씀드린, 최후 일격으로 맥락 끊기였습니다. 이 전투가 배우자에게도 동일하게 치러졌음은 물론입니다.


어머니도 배우자도 일대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배우자는 늘 그랬듯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어머니가 마침내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얘가 치료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주 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여기 와서 치료 받으면 더욱 착하게(!) 예전 모습으로 복귀할 거라 믿었을 것입니다. 저와 대화하는 동안 수긍하는 면모를 드러냈으나, 돌아가서 어머니는 끝내 그에게 말하더랍니다.


“얘, 제대로 된 의료기관에서 치료 받아야 하지 않겠니?”


그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제게 계속해서 치료받노라 선언했습니다. 독립된 삶을 숙의해가던 어떤 시점인가, 중대한 변곡점에 다다랐습니다. 하루는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정색하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보다 제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직감했습니다. 숙의를 마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40여 년 동안 남의 말을 듣고 따르기만 해오던 삶을 내던질 욕구가 그에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얼마 뒤, 그는 스스로 일단 숙의 종결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스승의 날 그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뵙고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힘을 길러주셨습니다. 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용기와 이정표도 주셨습니다. 선생님과 만난 것은 제 인생의 커다란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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