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지음,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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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을 발견하고 처음 읽은 책 세 권에 차례로 꼼꼼히 주해 서평을 썼다. 다음에 읽은 책 두 권에는 주해 서평을 쓰지 않았으며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 3월 어느 날 서점에서 그의 『선불교의 철학』을 보았다. 선불교에 입을 댔다기에 호기심이 동해 집어 들었다. 말하자면 더는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내용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결론: 2002년 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라도 읽는 데 들인 공이 아깝다. 단, 옥간의 그림을 알게 해준 것은 고맙다.


법률상 국적이 어딘가와 무관하게 한병철은 독일인이다.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쓴다. 그의 사유와 글이 독일 땅에서 ‘대박 난’ 것은 한국 출신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기보다 시선과 내용에서 독일 적합성이 탁월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그의 사유와 글에서 한국 적합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내가 이 지점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한국인이면 한국적인 시선으로 철학을 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한국 현실을 고민하는 내용쯤이라도 담아야 하지 않느냐, 뭐 이런 거 아니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써 독일에서 대박 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에 내놨더니 역시 대박이 났다, 자 이 현상 뒤에 똬리 튼 실체적 진실은 대체 무엇이냐, 이런 거다.


손쉽고도 게으른 대답은 한병철 철학의 보편성 운운이다. 이건 그 동안 외국 유학파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유해온 너절한 전제다. 철학이 당최 무엇인가, 보편이 과연 있기는 한가, 묻는 것보다 실례를 하나 들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명문중명문인 St. Johns College는 재학생 필독서 100권(2014년 판)에 서구 이외 세계의 책을 단 한 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따위 자세를 한국인이 내면화해서 생긴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병철 신드롬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국의 한 대학이 동아시아 고전만으로 필독서 100권을 정했다면 이 땅 지식인, 특히 유학파는 과연 뭐라 말했을까. 췌론의 여지조차 불필요하다.


보편은 없다. 보편철학도 없다. 한병철의 철학은 독일철학이다. 한국인이 독일철학을 알아서 안 될 일이 무엔가. 지향과 내용을 따져 배울 만하면 배우는 게 맞다. 사실 여태 우리는 이런 유의 행위에만 골몰해오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러면서 보편을 배우는 거라 스스로 속였다는 사실이다. 열 걸음 물러서자. 그래, 그들에게서 보편을 배워왔다 치자.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우선, 왜 보편철학은 저들만 빚어내는가? 다음, 저들이 빚어낸 보편철학을 배워 들여 이 땅에서 설파하는 목적은 뭔가?


한병철은 이 땅에서 보편철학을 빚어낼 힘이 없다. 한병철은 이 땅에서 한국철학을 빚어낼 마음이 없다. 한병철이 독일, 그러니까 서구로 날아간 이유 둘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가 된다. 그래야만 철학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거기 상응하는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로. (신)식민지 지식인에게 익숙한 판단법이다. 철학과 현실 삶을 구별하고 오로지 철학을 위한 독일이었노라 하는 말은 일제 세상이 백년 갈 거라 믿었다 한 미당의 말보다 훨씬 비굴하다. 한병철이 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을지 모른다. 정녕 그런 생각을 지니지 않았다면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대박 나)는 일은 거절했어야 이치에 맞다.


EU를 이끄는 국가로서 제일세계의 한 축인 독일의 탁월한 사회정치적 조건에서 한병철은 그의 담론을 생산한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한국인에게 그의 담론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인가. 그것은 어떤 맥락에서 인문정신인가. 의미는 너무 아득하고 맥락은 너무 동떨어진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의 결정판이 다름 아닌 『선불교의 철학』을 향한다.


독일에게 선불교의 철학적 사유는 모름지기 충격이다. 서구 사유 전승의 기라성들과 맞대면시키면서 한병철이 풀어낸 선불교 담론은 서구의 有적 집착을 일거에 베어버리는 호쾌한 無의 검이다. 이 검은 자본주의 최첨단에 서서 수탈체제를 향유하는 오늘 독일에게 다시없이 통렬한 죽비일 것이다. 한국에게도 그런가. 적어도 내게는 추호의 울림조차도 없었다. 중국과 일본 자료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인용하며 꾸려가는 한병철의 이야기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갈마저 자아냈다. 물론 독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저작이니 그들이 닿지 못하는 원문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어 원전은 거의 전혀 번역되지 않았을 터이니 설혹 그가 읽고 영향 받았다 하더라도 한국 선불교 사유를 인용할 길이 원천 봉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길목 저 모퉁이 허다히 등장하는 하이쿠를 지나치면서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이 책의 번역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은 듯하다. 번역에 즈음해 한 마디 말도 없는 걸 보면 저자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끝내 나는 질문하고야 만다.


한병철에게 철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의 철학관을 모른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 나는 더는 한병철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물리학이 그러하듯 한병철의 철학 또한 내게는 포르노로 다가온다. 보편이 아니어도 좋고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나 스스로 나와 나의 삶의 조건인 공동체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나를 묻고 세계를 묻는 일을 할 것이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의 궁구를 철학이라 할 만하다면 나는 그렇게 철학하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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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2017-05-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카로운 물음과 비판 좋은데...오늘날 독일로 떠난 사람을 (신)식민지 지식인에 빗대는 시대착오는 무엇이오? 한국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본문에 따르면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인간. 내가 생각하는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잘생긴방통 2017-09-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뽀르노도 수준 높은 고급 뽀르노는 나쁘지 않습니다.ㅋㅋ 지루하고 저급한 심각한 체하는 책들보다 훨 낫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