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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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출간 직후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와 잠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효의 화쟁사상 쪽으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그는 자녀에게 용서·화해에 앞서 제대로 싸우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원효는 대부분 오독되고 있으며 옹골차게 입쟁立諍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강조했습니다.


통속종교는 더할 나위조차 없거니와 통속만이 대박 나는 한국사회가 범죄 수준으로 억압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옹골찬 의심, 옹골찬 질문, 옹골찬 싸움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 하든 국론통일이라 하든 사실은 극소수 권력층의 안위를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제기立諍를 철저히 해야 철저히 싸울 수 있고, 철저히 싸워야 후회 없이 싸움을 끝낼破諍 수 있습니다. 후회 없이 끝난 싸움을 전제하지 않은 화和는 야합입니다.


어찌 하면 옹골차게 입쟁立諍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토대는 인문정신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함께 읽어온 『인간의 위대한 질문』을 통해 이 인문정신이 제기하는 질문을 결결히 겹겹이 목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6.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질문하려면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보태져야 합니다. 정치경제학비판의 안목이 없으면 질문에 역동성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역동성이 실천을 머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음미하면서 마지막에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다는 말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인문정신의 밋밋한 보편을 넘어 울퉁불퉁한 개체의 답을 하려 할 때 단도직입으로 육박할 수 있는 길은 예수 삶의 구체적 맥락입니다. 예수는 우리 옆에 동행하는 낯선 사람임과 동시에 그 낯선 자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본뜨는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신성을 드러낼 수 있으며 신성이 내주하는 인간의 숭고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귀 기울여야 할 말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희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처럼 격렬하게 사랑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은 고문 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 까닭에 죽음을 맞는 정치범 말이다.”(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 38쪽)


테리 이글턴이 과격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신의 길을 아직 모른다가 하나입니다. 알아도 그런 길은 가지 못하겠다가 둘입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배철현을 함께 읽어온 독자라면 자신의 인연과 선택 자체에 옹골찬 의문 하나쯤은 품어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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