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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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바로 ‘낯섦’과 ‘다름’이다.·······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바로 종교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341쪽)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을 단 책의 에필로그가 <16. 너의 옆에 동행하는 낯선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단 글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필연이기도 하고 진부한 동어반복의 우연이기도 합니다. 그 질문에 신이라는 답을 내놓으면 일상 속에 스며든 장엄을 알아차리는 경이를 향하게 되므로 의미심장한 필연입니다. 그 신이 결국은 이웃이라는 미만함으로 번져가므로 진부한 동어반복의 우연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묻는 질문과 이웃을 묻는 질문이 매끈하게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항상 옳은데 늘 무력한” 말의 전형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정확한 상황입니다. 기독교인 그 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며, 내 옆에 동행하는 낯선 이웃이 다름 아닌 하나님임을 부인할 것입니까. 기독교인의 이 당연한 지식이 지금 망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대체 무슨 힘으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저지 능력이 없다는 표현은 도리어 부족합니다. 광적으로 부추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체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4.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에서 살펴보았듯 질문을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문제에서 질문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누가 이웃이냐를 물어서는 안 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무엇이 이웃이냐를 물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누구’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무엇’은 실천의 문제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정체성은 명사의 문제이며 실천은 동사의 문제입니다. 내 옆에 동행하는 낯선 자가 신이라는 사실은 명사적 문제입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신에게 내가 무엇을 실천하느냐는 동사적 문제입니다. 절대 중요합니다. 나의 주체적 실천이 없고서는 옆에 동행하는 자가 신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흥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신을 보거나 믿어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구원을 스스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다는 말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이 책의 답은 밋밋합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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