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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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여성적 질환입니다. 남성중에서도 여성적 성격을 지닌 사람이 우울증에 더 잘 걸립니다. 남성이 우울증에 깊이 침륜되면 여성적으로 됩니다. 결국 여성우울증은 우울증 중의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여성우울증은 그 깊은 고통의 우물에서 희망과 미학과 가치, 그리고 준엄한 문명비판인 하늘의 뜻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이치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치대로 사는 생명은 서로 소통하여 공존하고, 함께 도약하여 경이로워집니다. 자기 모독에 휘감긴 우울증이 이런 하늘의 뜻을 담는다는 것은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의 바로 이런 가혹한 특성이 하늘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려서 버림의 악순환을 막는다는 역설. 누군가 자기를 버리면 공존과 경이의 세계가 가능할 때 과연 누가 자기를 버릴 수 있을까요? 슬픔을 제 생명 감각 속에 지닌 사람입니다. 슬픔을 살아낸 사람, 그래서 그 슬픔이 찬연한 것임을 깨친 사람입니다. 슬픔의 침전이 우울증이고, 그 가장 웅숭깊은 시공에 여성의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우울증이 하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과 우울증을 신비주의로 몰고 가려는 음모로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이참에 그 신비주의를 한 번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성은 그렇다 치고(종종 있어 왔으니까) 우울증 신비주의, 솔깃하지 않으십니까? 미美 중의 미, 비애미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영양가 넘치는 시도가 아닐까요?(307-308쪽)


저는 출근을 걸어서 합니다. 이른바 미토콘드리아 운동법으로 30여 분을 빠르게 걸어 3km남짓 이동합니다. 오늘도 역시 용마산 자락의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오다가 아침 운동 중인 동네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가끔 한의원에 와서 침 치료를 받는 몇몇 분이 계셨습니다. 두루 인사를 하고 지나쳐 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저를 잘 모르는 분에게 설명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아, 그 왜 오거리 침쟁이 있잖아!”


그렇습니다. 신식민지 대한민국에서 한의사는 침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의대와 똑같이 6년 동안 공부하고 국가고시를 통해 보건복지부장관이 공인하는 면허를 받은 의료인임에도 한의사는 이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내 경험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고 남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두는 식민지의 자기부정이 빚은 우울증 어법입니다.


오전 내내 그 말이 귓가에서 윙윙거렸습니다. 물론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노라 호들갑을 떨 까닭일랑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 인욕忍辱이라는 수동적 차원에 머물던 생각을 이제 능동적으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욕됨을 그저 묵묵히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됨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도리어 망해가는 이 공동체를 되살릴 동력으로 만들 길을 찾는 것입니다.


욕된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스스로 욕됨을 발효시켜 공존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욕됨을 발효시키면 거기서만 싹 터 수평으로 뻗어가는 연대의 줄기가 자라납니다. 키 없는 줄기가 서로 엮일 때 경이의 생명이 창조됩니다. 경이의 생명은 광활함으로 나아갑니다. 광활함에서 나는 너이며 너는 나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고스란히 사라질 때 비로소 홀가분하게 나는 나이며 너는 너입니다. 그 이상의 경지는 중독입니다.


오거리 침쟁이인 저는 오거리 침쟁이의 사회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 없습니다. 침쟁이는 침쟁이인 대로 충실할 따름입니다. 마음병을 치료할 경우는 대부분 제가 한의사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분들이므로 거기에 맞게, 더 나아가 사회인문적 지평까지 열어 내용을 넓힙니다. 연대는 일방적 행위가 아닙니다. 각자의 슬픔이 나지막이 서로 관통하고 흡수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슬픔의 연대는 나지막해서 높다랗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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