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5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其不行矣夫.

자왈 도기불행의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는 아마 행하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2. 제4장에서는 현재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연유를 밝혔습니다. 여기서는 미래에도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아니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예상은 다만 예상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탄식으로 슬픔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호라, 도는 끝내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로구나!”

 

공자의 예상은, 또한 시간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춘추전국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정치경제학비판입니다. 강자, 승자로서 정복만을 가치로 삼는 제후의 정치경제학을 향해 날리는 직격탄입니다. 인간의 상호적 삶을 거절하고 야차의 일방적 삶을 맹렬히 추구하는 ‘특별한’ 집단에게 날린 저주의 독설입니다.

 

3. 공자 이후 2500년, 오늘 여기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이 땅의 권력이, 재벌이, 통속 종교가 어떻게 도를 짓밟고 독식의 추한 미학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공자가 우리 앞에서 중용을 말한다면 “아마도[기其]” 대신 “반드시[필必]”이라고 고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식민지 체제를 대놓고 찬양하는 집권세력은 국민의 공포·불안을 볼모 잡고 거침없이 도불행道不行의 악정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자 세월호사건을 일으켜 덮었습니다. 역사교과서 획일화 협잡과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 문제 야합을 책동하고 있습니다. 괴물 매판자본인 재벌은 국민의 소박한 욕구를 탐욕으로 부추겨 거대한 수탈체계의 노예로 삼아버렸습니다. 돈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 그러니까 ‘대박’을 좇다가 결국 ‘쪽박’을 차고 마는 삶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영성일랑 애 저녁에 말라버린 통속 종교는 백성의 무지를 약점으로 잡고 행복 장사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권과 재벌의 마름 노릇을 하며 신도를 삿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의 삼각동맹이 대한민국 도불행道不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입니다.


도불행道不行의 체제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 어느 누구도 이 억압과 수탈, 그리고 사기의 직접적 대상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이가 세월호에 타지 않았다고 해서 세월호사건이 남의 일일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심신상관적 타격, 사회경제적 손실이 구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파고드는 것이 촘촘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박’의 헛꿈 안 꾸고 건전하게 살아도 ‘대박’나는 극소수 사람들로 말미암아 양극화의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졸지에 하층민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우리 자신이 시시각각 확인되고 있습니다.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내는 전기요금에는 세계적 재벌이 내야 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가스 요금에는 독재자의 기념관 건립비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해마다 걷히는 시주가 1조 5천억인데 이걸 들고 고위층 승려들이 도박판을 벌입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돈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가장 공격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개신교 대형교회 목사들이 저지르는 정치개입·교회세습·성폭행·횡령 등 각종 비리는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사회문제입니다. 나는 개신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 패악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4. 『중용』의 심장을 겨누는 강호의 고수들은 더 이상 『중용』을 비현실적, 관념적, 형이상학적 담론의 준거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뜬구름에 태워 도를 이야기할 세상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여기 펼쳐지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 앞에서 도를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도불행道不行의 현실을 외면한 중용의 실재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허구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른바 고수들은 저 삼각동맹의 부역자일 따름입니다.



『중용』은 명백히 현실 정치적 텍스트입니다. 현실 정치가 패도인 한, 『중용』은 준열한 정치비판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읽는 『중용』은 청년 실업 문제가 왜 생겼는지, 5만 원 권 지폐 발행이 왜 우리 경제에 독인지, 노인 자살률이 왜 세계 최고인지, 세월호 아이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질문의 비수를 입에 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용』은 다만 ‘이따위’ 고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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