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전읽기를 하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 덩이들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어떻게 읽으면 『중용』이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고전이 될까요?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 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일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써 완성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주희는 사대부 시각에서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입니다.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앞서 품은 의문에 집중하여 생각하면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은 단순한 대형 해양교통사고가 결코 아닙니다. 짧게는 지난 50여 년 동안 개발독재 세력이 저질러온 정치적 범죄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길게는 이 나라를 1400년 동안 수탈해온 매판적 지배세력의 헤게모니 유지·강화 전략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 나라 암울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는 이 나라 견고한 지배구조를 전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과제 앞에서 『중용』을 읽으려면 두 가지 다른 독법이 필수적입니다. 우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동사적 어법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사적 어법으로 읽을 때, 세월호 아이들은 살아 있는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중용』을 개인 수신 텍스트로 읽어서는 안 되고 정치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정치 텍스트로 읽을 때, 『중용』은 이 나라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변혁의 텍스트가 됩니다.


우리 과제와 거기 따른 우리 독법에 유념하면서 이제 『중용』 세계를 열어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