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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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설·······

  남성의학·······형식논리에 기대어 병을·······적으로 취급하는·······의사는 전사戰士로서 악한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전사에게는 말(언어)이 필요 없습니다. 남성의학의 주체가 말을 꺼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꺼린다는 것은 은유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를 꺼린다는 것은 역설을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유의 절정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은 형식논리의 무덤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은유에 능하다는 것입니다.·······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역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성·······여성의학의 시공간입니다. 여성은 그 몸에, 마음에 삶에 역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이 바로 그 역설입니다.

  월경이 왜 역설일까요? 출혈은 죽음을 의미하니 달마다 죽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주기적으로 죽음을 용인합니다.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임신이 왜 역설입니까? 텅 빈 제 몸 한가운데에 구토를 일으킬 만큼 낯선 다른 생명을 용인하여 채워 넣습니다. 여성은 비움과 채움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출산이 왜 역설입니까? 출산의 아픔은·······밀라레빠의 고통을 넘어섭니다.·······동시에 지고한 깨달음痛悟이자, 기쁨입니다. 아픔과 기쁨, 괴로움과 깨달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육아가 왜 역설입니까? 어머니는 아기의 우주입니다.·······그 우주는 깨집니다.·······여성은 나와 남, 일치와 단절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완경이 왜 역설입니까? 달마다 죽던 일은 멈추었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짓던 일 또한 멈추었습니다.·······다시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자신이 역설 속에 있고 또 역설을 창조하는 여성의 생명 감각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보면 그 눈에 박멸해야 할 적이란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맞은편의 존재는 죽여야 한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치졸한 유아기적 형식논리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진실이 말을 통해 은유로 화해하고 역설로 하나가 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 건강과 병 사이의 대립적 구별은 사라집니다.·······(134-135쪽)


본디 안식년이란 고대 히브리 역법에서 7년 주기의 마지막 해로서, 땅을 갈지 않고 묵혀 두고, 가난한 자와 짐승들을 먹이고, 빚을 탕감해 주고, 종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적 휴식 제도였습니다. 이것이 현대 산업사회에 와서는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주는 1년 정도의 장기 휴가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최근 들어 이 문제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의사는 그다지 행복한 직업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병든 사람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은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아픔 속에 있기 때문에 날카롭고 급하며 심지어 이기적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말이 앞서고 상대방의 말은 뒷전이기 쉽습니다. 가령 진료 받으러 와서 온갖 증상을 나열하고 난 뒤 반드시 붙이는 ‘이거, 왜 이래요?’ 라는 질문은 의사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진정한 질문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요? 얼른 고쳐요!’ 이런 말입니다. 통증의 진실을 알려서 참된 건강으로 인도하는 의사의 말을 미리 차단하는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통증이 소통을 제압하는 상황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진료실 풍경입니다. 이 풍경 속에서 오랜 날들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수직으로 치솟는 단절감, 심지어 분노를 감지합니다. 얼핏 보면 환우들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소통의 부재에 있습니다. 그 소통의 부재는 모순만 노정되지 역설로 넘어가지 못하고 가로막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순의 노정이란 ‘그렇다’와 ‘아니다’가 적대적으로 마주 볼 뿐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가 ‘그러나’를 사이에 두고 그저 존재적으로 공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와 ‘아니다’가 ‘그러므로’를 매개로 하나의 생명장生命場으로 들어서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역설은 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관계가 맺어져야 비로소 소통이 성립합니다. 의사가 환우와 함께 역설을 빚어내지 못하고 모순 속에 마주서 있기만 할 때, 그것을 더는 견뎌내기 힘들 때, 바로 이때, 안식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와 ‘아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환우의 통증이 ‘그렇다’이고 의사의 치료가 ‘아니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환우의 통증은 부정되어야 할 나쁜 것이므로 주류 의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앞뒤가 바뀝니다. 주류의학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순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순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실재의 모순은 노정된 채로 있습니다. ‘통증을 잡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라는 주류의학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오류입니다. 통증은 본질적으로 병을 알려주는 전령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경청해야 할 무엇입니다. 경청은 ‘그렇구나!’입니다. ‘그럴만해서 그렇다’입니다. 나아가 통증은 일차적·자체적 치료행위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응원해야 할 무엇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도와줄게.’입니다. ‘그렇다’를 대뜸 부정해서 ‘아니다’로 만드는 것은 진정한 치료가 아닙니다. ‘그렇다’를 ‘그렇다’고 인정해줌으로써 스스로 본디 건강한 상태인 ‘아니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진정한 치료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나’에 터하여 폭력으로 해체하는 주류의학은 부분이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 의학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므로’에 터하여 역설로 해결하는 의학이 진정한 의학입니다. 사실, 역설도 그리 탐탁한 표현은 아닙니다. 원효의 화쟁이 월등한 표현입니다. 더 월등한 표현은 [아래아 한]입니다. [아래아 한]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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