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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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터질 때마다 벌떼 같이 덤벼들어 잉잉거리지만 결국·······‘뒷담화’의 여운만 남긴 채 우울증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고야 마는 한심한 작태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우울증의 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울증은 오히려 사소한 일상의 습관들 속에 속살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없다 싶을 정도로 잘 웃는다, 늘 양보한다, 따스하게 남을 배려하며 보살핀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한다, 손해 보고라도 공존을 꾀한다, 급기야 자기를 베어 남을 살리는 자기 파괴적 희생을 감수한다, 경쟁 국면에서 물러선다, 직장생활에서 언제나 일 많은 곳에 배치된다, 꼭 못된 상사를 만나 고생한다, 사고를 자주 당한다, 상대방(연인)의 약점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심각할 정도로 숫기가 없다, 거절당할까 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그냥 침묵한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노력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에 좌절한다, 좋은 기회를 놓치는 징크스가 있다, 아무리 푹 쉬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고 무력하다, 목표를 성취했을 때 이상하게 허망해진다,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때에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상대가 떠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휘말린다, 등등….

  이들을 다만 기분장애 정도로 다루고 말 일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우울증이 한 인간의 삶의 오랜 습관, 곧 인격, 아니 존재 자체, 더 나아가 그와 맞닿은 세상 전체와 깊이 결합된 복잡하고 웅숭깊은 문제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평범하지만 비범한 증거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들에게 꼼꼼히 주의를 기울이면·······직관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의력이 바로 여성적 생명 감각입니다.(105-106쪽)


악인은 죄상이 드러날 때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가해자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사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심상히 말하고 행동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특별한 공격이라는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주고받은 자잘한 상처가 퇴적되어 어느 날 우울증으로 나타나면 이렇게 시치미를 뗍니다. “도대체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요?”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부모입니다.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가족입니다.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입니다. 나도 그대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오색무지개 또는 일곱 빛깔 무지개라고 하는 것은 인식하기 쉬운 두드러진 색을 중심으로 개념화한 결과입니다. 무수한 점이지대를 소거한 이런 편의적 인식 프레임은 마음병을 상담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현장에서도 작동합니다. 유발요인이나 악화요인도 크고 뚜렷한 것에 집중합니다. 증상도 크고 뚜렷한 것에 집중합니다. 치료도 크고 뚜렷한 것에 집중합니다. 그 그물을 던져 걸려 나오는 것이 없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이 뭔가 ‘각 잡고’ 찾아내야, 이름 붙여야, 생색내야 직성 풀리는 전문가 집단이 반성 없이 반복하는 치명적 실패입니다.


우울증은 죽음 같은 상실을 겪은 아이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옆집 아이와 가볍게 비교를 당한 아이에게도 나타납니다. 우울증은 자살 시도와 같은 증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 늘 먼저 연락해오는 증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우울증은 전문적인 정신요법으로 치료한다고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인문적 대화로 일상을 양육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소한 진단이 위대한 진단입니다. 사소한 치유가 위대한 치유입니다.


이 마편초 꽃 시든 유리병

부채가 닿아 금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려니,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가벼운 생채기,

하루하루 결정結晶을 좀먹어들어,

보이지 않지만 어김없는 발걸음으로

차근차근 그 둘레를 돌았다.


맑은 물이 방울방울 새어 나가,

꽃의 진액은 말라들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였으나,

손대지 말라, 금갔으므로.


곱다고 쓰다듬는 손도 때론 이런 것

남의 맘 스쳐서, 상처 입힌다.

그러면 그 마음 저절로 금가,

사랑의 꽃은 말라죽는다.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멀쩡해도,

가늘고 깊숙한 상처가 자라

나지막이 흐느껴 운다.

금갔으므로, 손대지 말라.


쉴리 프뤼돔 <금간 꽃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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