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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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증, 문명이 병든 것입니다

  ·······우울증은 이미 전 지구적 화두로 자리 잡았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끌개로 하는 이 문명이 수십 억 인류 전체의 삶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를 무서운 속도로 파괴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우리가 견지해 온 가치와 지향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왜 인간인지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 위대성의 징표라면 어째서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데 인간에게 더할 나위없는 잔혹한 착취와 소외, 그리고 죽임이 가득차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 문명의 주동자들은 의도적으로 절대다수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인류를 우울증 상태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자기 모독이 빚어내는 파괴적 희생과 포기, 그리고 거절 결핍은 그들의 수탈적 권력과 명예, 부를 키우고 보전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대한 음모적 문명 건설 과정에서 인간은 대상이 되고, 사물이 됩니다. 바로 그 대상, 사물의 연장선에 인간 생존의 환경 조건이 있습니다. 결국 이들 또한 착취와 소외, 끝내 죽임의 목표가 되고 맙니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물론 땅, 바다, 산, 강, 얼음, 눈, 공기 모두 이 문명의 칼날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울증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문명 자체·······의 병이 되고 맙니다. 우울증은 이리하여 가장 깊고 어두운 사멸의 전령이 되고 맙니다.·······이 문명을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필부필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요.(99-100쪽)


젊은 날, 먹물 근성을 누그러뜨려볼 요량으로 아주 잠깐 일용직 건설 노동을 했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인 어느 해 8월, 원주 근방 마을에 가서 자그만 건물 하나 올리는 데 미장 보조로 뛴 적이 있었습니다.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뙤약볕 아래 작업은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소주 몇 잔 들이붓고 붕 뜬 상태에서 일을 했는데 술기운이 몸을 빠져나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형언할 수 없는 전신 통증이 밀려들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그날 일과를 마쳤습니다. 저녁식사 때는 다시 소주를 붓듯 마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에 떨어져야 하니 말입니다.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를 기다리던 짤막한 시간, 문득 이런 깨달음이 들이닥쳤습니다.


“아, 저 수없이 많은 건물 벽에는 이런 노동의 고통이 엉겨 붙어 있는 거구나. 피라미드, 만리장성에는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켜켜이 깔려 있는 거구나.”


오늘 날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마차 공기처럼 누리며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누림 앞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눈물과 목숨이 놓여 있습니다. 거기 부여된 의미가 이게 다는 아닐 테지만 문명이라는 것도 결국 아무리 높게 평가해봐야 편의의 차원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아니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문명의 사전적인 뜻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기술적·사회 구조적 발전, 그러니까 자연 그대로인 원시적 생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입니다(국립국어원). 문명은 분명 더 나은 삶을 위해 인류가 지성·의지를 동원해 행동해온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문제는 문명에 욕구를 넘어 욕망을 채우는 향락적 도구화가 진행될 때 일어납니다. 향락적으로 도구화된 문명은 착취와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착취와 불평등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생태계 모두에게 가해집니다. 하늘과 땅 모두가 우울증에 빠져듭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 인류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편의를 넘어서 극소수 지배층의 테마파크가 돼버린 문명 탓입니다.


인류 대다수를 우울로 몰아 살殺처분하려는 야심찬 기획은 역사상 최초로 금융제국주의를 창건한 미국의 지구 식민화 전략의 일부이자 결과입니다. 문명이 제국의 발아래서 수탈의 마름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이 인간이려면 의당 이 문명을 거절해야 합니다. 이 문명을 거절하려면 무엇보다 이 문명의 사유체계를 거부해야 합니다. 이 문명의 사유체계를 거부하려면 이 문명의 목록inventory어語를 내다버려야 합니다. 이 문명의 목록inventory어語를 내다버리려면 이 의문문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늘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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