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의 핵심은 자긍심의 파괴, 자기모독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을 죄로 여깁니다. 언제나 남부터 배려합니다. 양보하고, 희생합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다 퍼주지만, 제 것을 달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 시대에서 먹잇감으로 이미 굳게 자리 매겨져 있습니다. ‘슈퍼모델 신드롬’이 횡행하는 이 ‘유명인 문화celebrity culture’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양육강식, 승자독식의 이 정글 자본주의 속에서 그가 무슨 떡고물인들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잘난 사람을 더 잘나게 만드는 정책을 개혁이라고 우기는 정치에 보대끼며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부서져 내릴까요?

  그리고 보면 우울증이란, 적어도 이 시대에는 절대다수의 숙명적인 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대80이니 10대90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1대99가 맞는 듯합니다. 99%가 서로 못나서 미안해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너무나 확실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1%가 통치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우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비우라는 말의 전제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절대다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신을 돌려주어야 진정한 비움의 세상이 도래합니다.

  ·······우울증의 영혼 속에는 이미 자율 자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무의미성 속에 잠겨 있습니다. 죽음으로서의 연명이라는 형용모순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모든 마음의 병 가운데서 오직 우울증만이 희생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명이라는 것도 필경 이 희생적 우울증 환자들의 목숨 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녕 인류가 이 문명을 지구에서 길이 보전하고자 한다면 버려지는 자들의 슬픔을 함께 짐으로써 상생의 환희를 일구어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버려진 자가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기적을 축복으로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39-41쪽)


세월호사건-중동독감사태-역사교과서 획일화-일본군성노예범죄 문제 야합으로 이어지는 현 정권의 현란 무쌍한 고의적 실정은 실로 점입가경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허언과 훈계입니다. 발을 뗐다 하면 독재 회귀와 영구집권의 길입니다. 요즘은 일본군성노예범죄 야합을 두고 자화자찬 놀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피해자 몰래 가해자에게 무릎 꿇어놓고도 적반하장의 윽박지르기를 자행합니다. 정권의 마름 노릇을 하는 이른바 엄마부대의 광기가 가히 가관입니다. 일본군성노예범죄 피해자 할머니들한테 ‘강한 나라 만들기 위해 희생하라.’ 강요했다니 말입니다. 대체 어떤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까. 그 강한 나라는 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대체 무슨 희생을 더 하라는 말입니까. 정말 희생이 필요하다면 여태까지 희생 없이 무임승차한 엄마부대가 희생해야 할 차례 아닙니까. 엄마부대 대표라는 주 아무개는 자기 딸이 일본군성노예범죄 피해자였더라도 일본을 용서했을 것이라 했답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의 진정한 조국이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는 엄마도, 여성도,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물건들이 한국사회를 멸망의 비탈길로 밀고 있습니다. 망하면 저들은 떠나겠지요, 저들의 조국으로. 참담무인지경입니다.


저들이 기왕에 희생을 입에 담았으니 희생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희생은 건강한 자발성에서 나온 것일 때에만 가치로 자리매길 수 있습니다. 강요된 것은, 그러니까 희생되는 것은 살해당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강요된 희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직접적·명시적 강요에 따른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희생의 강요는 범죄에 해당합니다. 수탈, 그러니까 강도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런 짓을 할 권리를 지닌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한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될 약속이며 규범입니다. 오늘 여기 그 근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국가가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놓고. 더군다나 나라 팔아먹은 매판세력의 상속자들이 권력을 잡고 남용하여 식민지 치하 성노예범죄에 희생된 여성들을 다시 한 번 팔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청와대 2016신년인사회에는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대형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 짓을 웃으며 자행합니다. 이 1%의 떼강도가 국가 전체, 그러니까 99%를 희생양으로 잡고 곳간을 채웁니다. 국가 공동空洞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의 희생은 간접적·암시적 강요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울증이라 부르는 바로 그 병리 상태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스스로 눈빛을 거두고 희생, 그러니까 죽음을 삶 깊숙이 들여놓습니다. 스스로. 스스로 말입니다. 정색하고 묻습니다. 우울증 앓는 사람의 이 자발성이 과연 진짜 자발성일까요? 물론 아무도 희생 자체를 강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신!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희생하면 착하다고 칭찬해줍니다. 거부할 수 없는, 거절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훨씬 더 교묘하고 사악한 강요입니다. 이것의 결과를 우리는 편하게 병이라 부릅니다. 쟤, 우울증이라나 봐! 개인 문제로 환원시킵니다. 성격 탓, 정신력 탓으로 돌립니다. 죄의식 없이 그들을 착취합니다. 그들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내 행복의 감수성을 갈고닦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행복감의 가속도를 높여주면서 그들은 시나브로 죽어갑니다. 그들의 주검을 ‘사뿐히 즈려밟고’ 행복한 사람은 안철수를 정치하며, 백종원을 먹고, 황정민을 봅니다. 여행과 시와 음악의 기품 있는 정서로 배어듭니다. 행복한 사람의 행복은 결코 행복한 사람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까맣게 모른 채 피둥피둥 살다가 도살됩니다. 인간이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게 행복을 준 희생의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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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0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는 글입니다. 이미 비어버린 사람에게 자신을 비우라는 힐링처방은 아무 소용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죠. 내 행복은 남의 목숨값이다!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bari_che 2016-01-08 10:4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내 행복이 남의 목숨값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더욱 더 행복을 수탈하는 모범을 지배층이 앞장서서 보여주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희생을 강요받아 이미 비어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손 잡는 슬픔의 연대만이 이런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연대는 잊지 않음에서 출발합니다.

2016-01-09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