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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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얼버무리는 듯이 한 개인적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이었다.(71-72쪽)


“그 어떤 시인도 자신이 쓴 시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어디서 읽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저는 이 말의 제 버전 때문에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떤 상담의도 자신이 상담 중에 한 말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상담에서는 당연히 제 삶과 인격이 말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제 진실에 터하여 말하는 것은 불퇴의 원칙입니다. 원칙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자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살아내지 못한 이야기를 짐짓 체득한 표정으로 건네기도 합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런 괴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흔들리면서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연유를 저자가 차분하게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중용』제6장에는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악은 감추고 선은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을 척결하지 않고 감추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악을 너그럽게 묻어주어 언젠가 선으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두기 위함이 아닐까요? 여기 거짓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참과 거짓 여부는 말하는 순간에 최종적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거짓이 참으로 바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제가 자책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담치료를 계속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 또한 이 지평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 때문에 훨씬 더 격렬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부부 상담의 경우, “이야기의 진실성” 문제는 첨예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아내의 말이 100% 참이고, 남편의 말을 들으면 남편의 말이 100% 참인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둘의 말이 모순된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쪽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 처지를 최대한 반영하여 말하므로 자기 고통은 크고 뚜렷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고통은 “얼버무리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과장과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진실이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것은 인생에서 불가피한 일입니다. 모순의 공존이 빚어내는 역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서로 평등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대승적 진실성이 확보됩니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이야기도 지속됩니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흐름을 따라 진실이 형성되어갑니다. 진실은 불변적 실체로서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흔들리면서 결이 되어가는becoming 생명체입니다. 대한민국, 우리 공동체의 진실이 빠른 속도로 그 생명의 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거짓 이야기로 통치를 행사하는 권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부정선거, 대량학살, 역사쿠데타와 같은 이 시대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책임은 권력이 져야 하되 삶은 우리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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