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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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종종 더 적은 지식과 정보가 더 많은 작용을 한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생산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일이 드물지 않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19-20쪽)

 

조치훈趙治勳이라는 기사棋士가 있습니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이 조치훈은 중요한 기전을 하루 앞두면 바둑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밤새 마작을 즐긴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말은 매우 기이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기이한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일으킨 “생산적인 효과”를 확인하면 전혀 다른 유의 기이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삼관大三冠이란 일본의 3대 기전棋戰인 랭킹1위 기성전, 랭킹2위 명인전, 랭킹3위 본인방 타이틀을 동시 보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히 천하통일이라 할 만한 위업으로서 초절정고수가 아니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일본 바둑 역사상 최초로, 바로 그 조치훈이 1983년에 대삼관을 이루었습니다. 1996년부터 3년 연속 다시 대삼관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 2013년 이야마 유타가 대삼관을 이루었을 뿐 다른 기록은 아직 없으니 조치훈이 이룬 대삼관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치훈은 “공백”과 “빈자리”가 얼마나 어떻게 사유와 영감을 심화· 증폭시키는지 일찌감치 깨달은 천재였습니다. 바둑을 잘 둔 것은 그 결과일 따름입니다. 우리 같은 범재들은 공백은 메우고 빈자리를 없애야, 그러니까 밤새 바둑 공부를 더해야 더 잘 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이 더 좋은 결정을 내리게 하고, 더 많은 작용을 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당사락三當四落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망국적인 사교육 문제가 그래서 생겼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이수 과목이 많고 수업 시간이 긴 중등교육 과정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공백과 빈자리를 빼앗긴 아이들의 사유는 ‘암기’가 되고, 영감은 ‘찍기’가 되었습니다.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가는 힘을 잃은 아이들의 직관은 ‘말 잘 듣기’가 되었습니다. 이 암기와 찍기, 그리고 말 잘 듣기의 끄트머리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죽음 위에 세워진 투명공화국에 화 있을진저.

 

한의원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쭉 하니 병의 증상을 나열한 뒤에 꼭 한 마디 덧붙입니다.

 

“왜 이런 거죠?”

 

이 질문은 액면대로만 들으면 자기 병에 대한 곡진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은 대단히 복잡한 복선을 깔아놓은 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투명사회가 부추기는 정보강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TV 통해 듣고 인터넷 검색까지 해서 손에 쥔 정보를 들고 와서 ‘어쩌나 보자’하는 식으로 던지는 질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자신의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관건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문가로서 의료인은 잡다한 정보를 걸러 정확한 의학 지식을 쉽고 친절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보강박이 빚어내는 쇼핑과 헌팅 수준의 의료유람이 이 투명공화국의 또 다른 퇴폐상임을 알기에, 이따금 저는 “무지에의 의지(19쪽-니체 인용의 재인용)를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되묻습니다.

 

“알면 고쳐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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