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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우리의 몸은 어차피 썩어문드러진다.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는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216쪽)
옮긴이의 말, 마지막 부분입니다. 옮긴이 또한 철학자입니다. 철학자로서 철학자의 문장 하나하나를 살점 같이, 뼈마디 같이 여기며 옮겼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의제할수록 마지막 세 문장은 독자의, 아니 어쩌면 저자의 뺨을 후려갈긴다는 느낌을 줍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 아니 장 아메리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처럼 보이는 이 단정이 제게는 도무지 해량불가海諒不可의 모독으로 들립니다.
이 세 문장 앞에 인용한 헤겔의 말이 헤겔철학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와 상관없이 옮긴이 자신이 이 세 문장의 말을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인 만큼 그 어떤 헤겔 이해에 관해서도 완전한 알리바이를 대기 어려울 것입니다. 헤겔은 유대인을 인류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공공연하게 규정한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헤겔의 절대정신, 국가정신은 나치가 원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한 개념입니다. 헤겔 이후 계몽철학을 연구했다는 옮긴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헤겔의 그 정신을 갈고 닦는 일의 최고 자리에 유대인 레지스탕스 전사로서 나치한테 잡혀 참혹한 폭력을 당했던 장 아메리를 올려놓았을까요? 나치에게 고문당할 때 장 아메리는 열등한 유대인임에도 헤겔의 그 우월한 정신을 갈고 닦았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물론 옮긴이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이렇게 연결하고 결론지었을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필 헤겔을 인용한 것조차 옮긴이의 선의에서 비롯했다고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장 아메리가 육체와 정신을 수직으로 분리하고 상위의 정신만을 갈고 닦아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는가?” 단도직입으로 제 견해를 말씀드립니다. “아니다.” 그 결정적 근거가 다름 아닌 장 아메리의 자살입니다.
옮긴이의 마지막 말이 끼치는 영향도 그렇거니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단 하나, 나아가 책 전반에 걸친 오역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사소한 프랑스어 번역 문제를 뺀다면 이 부분의 검증은 제 능력 밖이라 번역본을 권위 있는 텍스트로 전제하고 최선을 다해 장 아메리의 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 아메리의 진실은 모름지기 칼날 위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