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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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23쪽)

 

인간은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써만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허물 수 있습니다. 경계를 세우고 허무는 변화과정이 인간입니다.

 

진실은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진실은 사실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써만 진실은 사실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을 딛고 뛰어넘는 운동과정이 진실입니다.

 

역사는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역사는 오늘이 어제를 계승하게 합니다. 기억으로써만 역사는 오늘이 어제와 단절하게 합니다. 오늘이 어제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역사입니다.

 

사회는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사회는 너와 나의 쌍무계약이 됩니다. 기억으로써만 사회는 너와 나의 파약송사가 됩니다. 너와 나의 계약과 파약으로 뒤엉킨 판이 사회입니다.

 

 

인간도 진실도 역사도 사회도 순도 99.99%의 놀라운 기억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도리어 더 많은 속이기 쉬운 기억 위에 세워집니다. 기억의 실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불가피합니다. 타인과도 자기 내면과도 고요히 또는 맹렬히 싸워야만 합니다.

 

인문의학으로 상담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런 순간들과 매우 자주 마주칩니다. 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기억을 스스로를 파괴하는 쪽으로 자꾸 재구성합니다. 과장하거나 축소합니다. 부가하거나 누락시킵니다. 심지어 당최 없었던 것을 새로이 지어내기도 합니다.

 

치료되고 싶다는 소망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치료과정이 불편하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연장하고 급기야 즐기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이쪽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곡진하고 결곡한 치료적 접근이 없는 한 평생 이렇게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기억을 위한 투쟁으로 다시없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조선의 멸망에서 시작하여 식민지·군정·내전·민간과 군부의 독재·매판 세력의 귀환으로 이어지는 정치사적 트라우마. 그리고 마침내 세월호사건. 219번 째 4월 16일, 오늘 우리 기억은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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