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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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o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내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느닷없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게 들이닥쳤다. 언제나 의식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내가 찾아내기를 바라왔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권두시로 올린 저 시의 ‘불확실한 시간’이란 표현은 조금 피상적인 번역으로 보입니다. 물론 uncertain에 ‘불확실한’이란 뜻이 있지만 문맥을 바르게 짚으면 ‘불확정인’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묘사한 바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말합니다. 정해진 때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때에 수시로 엄습해오는 극심한 통증agony의 재현, 그러니까 기억의 재-점화를 의미합니다.

 

임상에서는 이런 경우 트라우마가 마음에 ‘길을 냈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기차가 자동적으로 달려가도록 되어 있는 레일처럼 아픈 상처의 사건은 마음에 회로를 개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떤 요인이 작용하면 기억의, 통증의 기차는 기적조차 울릴 틈 없이 태고의 에피소드를 향해 돌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지금도 앓고 있는 사람은 벼락 같이 이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아침나절에 일어난 일을 점심나절에 기억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럼에도! 프리모 레비의 저작에는 이런 정서적 상황을 직접 드러내어 말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만일 격심한 통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아니 들어주지도 않는·······상대방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10쪽) 독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통증이 격심할수록 그의 문장은 냉정해지고, 냉정할수록 명징해집니다. 하여 섬뜩한 이야기ghostly tale일 수밖에 없습니다.

 

섬뜩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치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을 덜어내고 정색하며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통증을 거세하고 말하기까지 각고의 시간을 지나면서 심장은 다만 불타는 burn 것이 아니라 불타 없어지는burn out 것입니다. 참혹한 소진燒盡의 미학. 이는 극한의 통증을 지닌 자들의 숙명, 아니 천명天命입니다. 천명은 당위가 아닙니다. 당위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자유가 찾아 듭니다. 자유는 생사를 가로지릅니다. 용무생사用無生死.

 

우리 모두는 두 눈 똑바로 뜬 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고통에 찬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통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소리 높여 외칠수록 가해지는 경멸은 더 야비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이려면, 사람다운 사람이고자 하면, 극한의 통증을, 그 천명을 끌어안고 심장에서 타는 불을 소진되는 그 날까지 극진히 보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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