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부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호승의 시 <겨울부채를 부치며>다.
아들을 미워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나니
아들아 겨울부채를 부치며
너의 분노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하라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오늘밤에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이 되어 너의 집 앞에
평생 동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손을 잡고 마라도에서 바라본
수평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면
지금쯤 너와 나 푸른 물고기가 되어
힘찬 고래의 뒤를 신나게 좇아갔을 텐데
아들아 너를 엄마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은 미안하다
살아갈수록 타오르는 분노의 더위는
고요히 겨울부채를 부치며 잠재워라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나 다음에 너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면
겨울부채를 부치며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리니
이 시와 마주하는 순간 나타난 것은 바로 김선우의 공간 감각이었다.
“내 몸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갑자기 깨어날 때가 있다. 내가 속한 공간이 어떤 일렁임으로 가득 차있다는 느낌을 돌연 받게 되는 순간, 갑자기 화들짝 깨어나는 공간의 존재감 앞에 무릎 꿇게 될 때가 있다.”(106쪽)
다른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읽고 다른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
삶을 살았다. 그 기억이 나의 punctum을 형성하여 이 시와 마주하는 찰나, 서로의 공간을 증폭해서 일깨우는 파동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의 파동을 이끄는 저 하로동선(夏爐冬扇)의 겨울부채는 때에 맞지 않아 쓸 데 없는 사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분노가 일으키는 열이 얼마나 심하면 겨울에 부채를 부쳐야만 한단 말인가. 그렇게 이해하면 부채는 여간한 치료자가 아니다. 경이로운 치료자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만드는 일.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이 공간을 화들짝 깨우면서 공간 자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107쪽)
나의 분노를 고요히 잠재운 마음 속 겨울부채는 이제 의자(醫者)인 내 일상으로 실제 들어와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나는 진단할 때 부채를 쓴다. 많은 한의사들이 복부진단을 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하고 말지만 나는 복부진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환자를 눕게 한 뒤 상의를 걷어 올려 배를 드러내게 한다. 그리고 배에 손을 대고 짚고 누르고 두드리면서 듣고 묻는다. 체취를 맡는다. 색택, 피부상태, 크기, 균형, 지형, 각도, 주름, 배꼽의 깊이 등을 순식간에 본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게 바로 가벼운 부채질이다. 옷의 보온효과 때문에 복부 체온을 잘못 인지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환자 상태에 따라 내 손을 부채로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치료실에서도 부채를 쓴다. 목, 어깨, 등, 허리 부위 근육통을 침으로 치료한 뒤 파스나 크림 제제를 바르는 경우가 많다. 이 때 가볍게 부채질을 해서 청량감을 일으키고 다음 단계치료로 넘어가는 데 편의성을 높인다. 환자들은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중년여성이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부채 부쳐주는 한의사시네요.”

없어도 그만인 곳에 놓인 두 개의 부채. 안 해도 그만인 일에 쓰이는 두 개의 부채. 이 사소함이 어쩌면 위대함이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식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