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 해 가을 뼈아픈 사정으로 한의원 문을 닫고 낭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그 결과물 하나가 <안녕, 우울증>으로 나왔지요. 청소년 우울증에 관한 책 <파란 마음 멍든 마음> 원고는 어느 기자 손에 맡겨져 출판가를 떠돌고 있습니다.  전국을 흐르며 강연했습니다. 전공노, 인권활동가대회, 국가인권위원회, 여성센터, 복지관....... 그 와중에 제자 하나가 제게 아이팟을 건네면서 트위터를 권했습니다. 더듬더듬 시작한 트위터가 제게 새로운 행로를 열어주었습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글은 배우 김여진의 것이었지요. 강정마을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 활동가와 연락이 닿아 침을 싸들고 강정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하는 길거리 한의사 질은 평택 쌍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 심리치유 현장, 쌍차 노동자들의 영도 한중 행 소금꽃 천리길, 명동 마리, 경향신문사 13층의 송경동 시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트위터 140자 글쓰기에 흠뻑 취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자연스럽게 긴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제2선으로 물러섰지요. 처음에는 어떤 상실로 다가와 트위터를 꺼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타임라인 행간을 살피면 유장한 글이 읽히고, 내가 쓴 140자 글의 결을 따라가면 긴 호흡의 글이 쓰여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적절한 속도와  열심으로 트위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초, 희망 버스 대변인 이창근 씨가 기획한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 <희망 부스>의 `라디오 한의사`란 꼭지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제 시간 바로 앞에 김선우 시인이 출연했고, 거기서 만나 저자 친필 사인을 담은 <캔들 플라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 저는 이미 김선우의 팬이었습니다. 물론 시인 김선우지요. 그러다가 그의 <바리공주>를 읽고 소설가 김선우의 팬도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캔들 플라워>를 읽으면서 詩氣 물씬 풍기는 산문을 음미합니다. 함께 읽어보시렵니까?^^

 

`캔들 플라워`란 제목이 지시하듯 이 소설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해서 일어난 촛불집회 또는 촛불문화제를 주된 서사 광장으로 택한 것입니다. 물론 촛불의 정치학은 꽃의 미학과 결합함으로써 투쟁과 놀이, 역사성과 영성의 대칭을 가로질러 갑니다. 이런 의미 교차는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아니 자신을 일정 정도 반영한 것일 테지요.

 

이 땅의 사회 역사에 대하여 연속과 불연속의 경계를 이루는 identity를 지닌 존재, 지오(GEO)라는 아이 또한 이런 가로지르기를 상징합니다. 밖에서 온 제3자이면서도 이 땅의 사람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깊은 감수성으로 진실의 고갱이를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그 아이는, 그러나, 여기에 매몰되지 않는 `레인보우의 아이`고, 인간에 침륜되지 않는 `자연의 아이`입니다. 

 

"...튄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은빛 솜털날개처럼를 단 꽃씨가 드넓은 수평 속에 스미듯이.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속도감은 버린 꽃씨의 유영처럼." (14쪽)

 

지오의 "...출현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14쪽) 그렇다면 소설 전체가 이 소녀 때문에 일어난 일렁임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 일렁임은 "발칙한 것" (14쪽)이고, 발칙한 것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14쪽)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발칙하게` 말하건대 소설은 이 14쪽에서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오가 한국에 처음 닿은 인연은 희영. IMF로 거덜난 중산층, 그 소심함의 전형인 여자사람입니다. 매우 `적절한 확률`의 만남 아닌가요?^^ 이 만남에서 시작하여 연우, 수아, 민기, 숙자씨, 보리(사과), 홍노인, 그리고 이지훈...의 만남으로 번져갑니다. 각각 다른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이 촛불광장으로 나아와 `일렁임`으로 서로 부비고 엮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소소한 개인 에피소드와 거대한 정치 담론을 넘나들며 뒤엉킵니다. 무거운 판이지만 경쾌하게, 진지한 화두지만 즐겁게, 내재적 역사지만 초월의 표표함으로 너울너울 흘러갑니다. 이제 마흔 갓넘은 이 작가가 영특하게도 세계의 진실, 즉 비대칭적 대칭을 간파하고 있는 듯합니다. 초일극집중구조로 파멸을 향해 치딛고 있는 이 문명과 이 문명의 삼류 상속자들의 무지막지한 질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은 `발칙한 것`이어서 믿을 만합니다. 비대칭적 대칭의 논리와 속살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느냐, 와는 상관 없이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뒤집어, 일상의 관념 맞은편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아이, 지오가 작가의 분신이라 하면 매우 유치한 수준의 독서로 평가될 것임에 틀림없지만,  한꺼번에든 찰나의 시차를 두고든 작가의 눈은 대칭성 확보의 길을 좇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슬픔은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의 선물이래..." (119쪽)    

 

얼핏 들으면 기쁨에 방점이 찍힌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에 슬픔이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기쁨이 되고 싶은 소망도 헛 것이고, 인생 자체에 기쁨이란 도대체 성립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함이 더 진의에 부합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슬픔을 선물이라 함으로써 슬픔자체의 대칭성까지 끌어안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 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 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이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듯 인간의 인간다운 면모는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데 있습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초일극집중구조에 틈을 내는 진실의 감각이니까요. 이 말랑말랑하고  향 맑은 감각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볼 수 있기에 캐나다와 한국, 레인보우와 아현동, 자연과 문명, 개인과 사회, 축제와 시위, 섹스와 촛불, 가족과 연인, 욕망과 대의, 놀이와 정치.......그 사이에 가로놓인 통속한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유자재의 가로지르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오라는 '순수물질'이 주위와 소통하는 신비한(!) 힘은 그 순수물질이 상식과는 달리 '역설물질', 즉 모순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본디 역설순수의 존재는 더욱 빛나고 아직 그 이치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는 각자의 속도 인연을 따라 변해갑니다. 현실에서, 희망에서....... 지오의 생부, 이지훈, 이 시대 가장 절망적인 존재도 어깨를 떨어뜨리고 주춤주춤 지오의 결을 따라갑니다.   

 

소설이 가리키는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오 아이들이 촛불을 들게 만든 정권은 더욱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촛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설픈, 오히려 부작용을 낳은 껄끄러운 무엇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역사감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의 걸음걸이. 그 느낌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 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 (368쪽) 

 

지오의 걸음걸이는 이미 거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도 엄연히 시작되었습니다. 현실과 현실 '조금 위쪽' 사이, 그 역동무쌍의 경계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꽃 향기를 따라 지오 아이들은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알몸이면 더 좋겠지. 한국의 우리 모두! 그렇게 놀아주길 바라." (368쪽)

 

그대도 그렇게 노세요. 그렇게 바라세요.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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