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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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책을 두 달에 걸쳐 읽었습니다. 까닭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제 사유의 결이 비-화학적(?)(!)이기 때문이지요. 아, 이건, 뭐, 주기율표 암기, 기억, 화학적 지식,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리모 레비가 한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글을 썼던,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348쪽), 그리고 "자연주의자의 호기심"(348쪽)을 제가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이게 그와 저 사이를 가르는 금이었습니다. 

"저는 특이할 정도로 정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것 같아요."(348쪽)  

그렇습니다. 사실, 정확히 14년 후에는 제가 레비 스트로스 최후의 나이를 맞습니다. 물론 제 삶 그 자체를 그와 비교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허나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비교할 수도, 비교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찰나적 시간에서나, 사소한 일상의 공간에서나, 프리모 레비는,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그 투명한 눈으로 저를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 특히, 본디 인문사회학도였던 제가 낯설어 하면서 더듬거리고, 때로는 건성건성 지나가는 길목마다 그가 손목을 슬며시 잡아주었던 것이겠지요. 아르곤은, 아마, 다섯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세 문단을 못가 삼베 바지에 방귀 빠지듯 집중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격찬을 했더군요. 민망해서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 다섯 번 째만에 겨우, 나름대로 실존적 독서의 줄긋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도저한 비-화학적 감수성(?)(!)! 

결국 이 책의 깊숙한 읽기는  바나듐, 탄소 부분이 견인해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던 일인데, 작가의 연표를 세밀하게 살펴 그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로 끌어당기는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독서가 어느 정도 농익었습니다. 아, 물론 아직, 여러 번 더 읽을 생각입니다만! 

2. 일단, 저는 이 책을 프리모 레비의 아이덴티티, 그리고 죽음의 빛으로 관통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필립 로스와 나눈 이야기에서 그가 한 표현대로라면 이런 시도는 이 책에 대한 정서와 기억을 "흑백"(351쪽)으로 단순화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용서를 구하면서라도 이리 하는 까닭은, 제가 그런 context에서, 그런 punctum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3. 이책의 해설을 쓴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관해 한 말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말하면서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듐  이야기와 맞물려 있지요. 저는, 처음엔, 이 부분에서 저 아우슈비츠(정확히는 부나)의 뮐러 이야기가 등장할 줄 모른 채 읽다가,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부터 책 전체가 순식간에 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느낌은 단순화를 넘어 모독이자 오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 프리모 레비의 삶과 문학의 핵심 일단이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한, 제 느낌이 마냥 엉뚱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322-323쪽)   

그리고,   

".......나는 인간이 모두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그처럼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세상이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은 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비현실적이다. 현실 세상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은 무장한 이들의 길을 닦아야 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아니모든 인간이 대답해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무방비로 있는다는 게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323쪽) 

이 대목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의 의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추정은 서경식의 통찰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록 뮐러가 완벽한 적도 아니고 적의 대표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 상징으로, 프리모 레비가 마주해야 할 적은 뮐러일 수밖에 없는데, 그가, 만나기로 약속한 8일 후, 느닷없이,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프리모 레비의 냉엄하고도 옹골찬 이 생각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저한 절연의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그 문학적 문장의 교본인 실험보고서 문체로 간결하게 마무리합니다.  

"8일 후 나는 뮐러 부인으로부터 로타르 뮐러 박사가 60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324쪽) 

과연 그 답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생략되어 있는지....... 내가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이는데 그는 어땠을까,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이로부터 2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므로 섣부른 인과관계로 얽어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363쪽, 연보에 인용된 글)  

그렇다면, 자살에 대한 그의 웅숭깊은 이해는 20년이란 세월, 아니 전 생애를 견디며 정련되어 실천적 직면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결정"이라 했다는 사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덮었던 책을 다시 열어, 마지막 이야기, 탄소를 천천히 읽기 시작합니다. 앞에 어디선가 탄소 이야기를 마지막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떠올리며....... 급기야, 맨 마지막. 제 눈에는 이 "마침표"란 말이 책의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로 보였지만, 제 가슴에는 결코 그렇게 와 박히지 않았습니다! 

4. 첫 번째  아르곤 이야기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속한 디아스포라 유대교(인) 집단의 모순적이고 경계적인 아이덴티티를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이것은 이교도들(곧 구윔) 사이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의 비참한 유배 생활과 그들의 성스러운 소명 사이의 모순이다.......유대 민족은 흩어진 후 오랜 세월 동안 슬픔 속에서 그러한 모순을 살아 왔다......."(16쪽)  

한편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중심으로 다른 한편은 ".......큰 강처럼 흐르는 삶의 대열 변두리로......."(8쪽) 자리매김 되는 집단적, 역사적 모순이 프리 모레비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 숙명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숙명이 아우슈비츠로 그를 이끌었고, 그 아우슈비츠가 그의 문학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의 끝은....... 

5. 이 모순은 아연 이야기에서 좀 더 밀도 높은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말씀드린 바,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일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51-52쪽)  

이 부분입니다. 단순히 모순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 즉 "화학반응을 일으키는"(54쪽) 불순물이며, 소금과 겨자입니다. 모순은 여기서부터 역설로 나아가는 역동적 뒤섞임이 됩니다. 이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내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데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54쪽) 

홀연히 함민복의 절창 <꽃>이 떠오릅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 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6. 탄소 이야기로 아이덴티티를 철저하게 완성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탄소는 독특한 원소다. 그다지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고 안정된 긴 사슬 속에 스스로 들어가 결속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그리고 땅 위의 삶(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에서는 바로 그 긴 사슬이 필요하다. 그래서 탄소는 생명체의 중요한 원소다......."(329쪽)  

여기서 스스로 들어가 결속된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삽입"(331쪽)과 같은 의미의 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용해"(331쪽)로까지 이어집니다. 용해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용해된다는 것은 변화할 운명을 타고난(거의 '변화를 원하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실체의 의무이자 특권이다......."(331쪽) 

여기까지 가면 탄소는 단순히 어떤 결속된, 삽입된 요소를 넘어서, 그 대상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탄소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다.......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신경세포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세포의 일부분인 또 다른 탄소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 세포는 뇌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뇌, 글을 쓰고 있는 의 뇌다. 문제가 된 세포, 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문제의 원자는, 아무도 묘사하지 않았던 엄청나게 섬세한 놀이인 내 글쓰기에 속해 있다. 지금 이 순간 미궁처럼 복잡한 줄거리를 벗어나 내 손으로 하여금 종이 위의 어떤 여정을 따라 달려가며 기호들의 소용돌이를 그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세포다: 위로, 아래로, 두 차원의 에너지 사이로 이중 도약을 한 이 세포는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336-337쪽) 

스스로 삽입되고 용해된 탄소는 프리모 레비의 생명이자 삶이 되어 이 책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탄소는 어디든지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됩니다. 

"탄소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특수한 조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특수한 게 아니다."(326쪽) 

이것은 ".......위대한 인류를 대표하......나 익명의 존재들로 남겨질 뿐"(367-368쪽, 연보에서 인용된 글)인 프리모 레비 자신과 같은 숙련공들의 숙명과 일치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탄소와 문학과 그의 생명을 이렇게 연결합니다. 

".......나는 바로 이 탄소에게 해묵은 빚이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진 것이다. 최초로 내가 품은 문학적 꿈은 생명의 원소인 탄소에 있었다. 내 목숨이 별 가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끊임없이 꾸었던 꿈. 그러니까 나는 탄소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326-327쪽) 

저는 이 대목이야말로 프리모 레비의 모든 것이 담긴 절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탄소로 살았고, 그 탄소를 말했고, 그 탄소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불현듯 떠오르는  <중용> 한 구절이 있습니다.  

"君子之道 費而隱.(군자지도 비이은)." 

보통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로 이해하지만 저는 이를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지만(어디에서나 활동하지만)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로 읽습니다. 군자의 생각, 군자의 말, 군자의 삶은 보편적 이치와 생명력이 되어 편재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군자의 중용이 바로 저 프리모 레비의 탄소입니다. 그러므로 프리모 레비의 탄소적 "마침표"(!)는 그의 이치와 생명력을 우리 모두에게 "삽입"되고 "용해"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삶은 문학을 거쳐, 문학을 넘어, 마침내 보편성과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탄소가 그의 아이덴티티며 죽음의 의미입니다. 하여 그의 아이덴티티는 우리 모두의 아이덴티티를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핏속에 스며들어 따스한 생명으로 되태어납니다.  

7. <표>를 관통한다는 것이 썩 어울리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리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생각을 마무리하려 하자니, 다시 바나듐 이야기의 한 구절이 비수처럼 폐부를 찔러 옵니다. 

"침묵하는 다수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전략은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는 것,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것이(었)(괄호-필자)다."(320쪽) 

과연 그렇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는 지배집단의 참 모습에 대해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고,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길을 닦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들이 결코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의 탄소 프리모 레비는 "날마다 죽습니다." 어허, 哀哉 哀哉, 또 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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