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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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이 쓴 책 이름이 <신을 옹호하다>라고? 책을 읽을까, 말까, 하는 고민 말고,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의문입니다. 원제인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에서 이런 제목을 뽑아낸 게 번역자인지 출판사인지 잘 모릅니다. 왜 그랬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한글 제목은 몇 가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테리 이글턴, 이 인간 맛이 갔나, 이딴 글이나 쓰고 자빠졌어? 이런 반응 하나. 거봐, 마르크스주의자도 우리 '하나님'을 감싼다잖아! 이런 반응 하나. 그리고. 띠바, 그렇지 않아도 종교(기독교) 밥맛인데 심지어 사회주의자까지 나서서 거들어? 이런 반응 하나. 제목이 이렇지 않았으면 없었을 삽질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삽질이 책 판매부수를 늘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상업 마인드의 발로 아니었을까.......아무튼. 제목의 단호함이 테리 이글턴의 논쟁적 진심을 비틀어버린 것만은 분명합니다. 번역본 책 제목을 확정하기 전에 이 말 한 마디만 숙고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122쪽)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바로 옹호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삼척동자도 아는 바. 통속한 대립각이지요. (그나저나 여기 해독은 解讀일까요, 解毒일까요? 둘 다 말 되는데, 원어를 병기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전체 논지를 살펴볼 때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근본주의적이고 소아병적인 무신론자에 대항하여 통속 종교(기독교)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방어하기 위한 호교론으로 쓴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런 반대와 무시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토양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무엇이 참된 신 논의인가를 드러내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자신을 비극적인본주의자의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저자가 종교-그에게는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에 대하여 도치킨스와도 다르고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도 다른 자기준거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곳이 제1장 인간 쓰레기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어떤 견지에서  보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 각각의 몫이지만,  저자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편견 없이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1장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1장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관점을 그 어떤 신학자보다, 성직자보다 명쾌하고 기품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 신(하느님)은 초월적 제작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주는 존재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 조건이다.  

 * 세상이 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과의 사슬을 뛰어넘은 선물로서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란 뜻이다. 

 * 구원은 정치적 사랑으로서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높이는 문제다.  

 * 예수는 가혹한 죽음으로서 삶을 완성해내는, 격렬한 사랑, 자기부정의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춧돌로 쓰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매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그는 죽음의 격한 공포를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병든 사람,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아주는 혁명적 실천의 전형이다. 

 * 하느님의 나라는 정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다.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그리고 헛수고를 폭풍처럼 거치는 격동적 과정이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변화다. 

사실상 저자는 기독교를 준엄하게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재정의는 단순히 신학적 통찰에 의거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과 그의 삶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 터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통찰의 핵심에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가 자리하고 있지요.  

그가 말합니다.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는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할 수 있다."(97쪽)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한다, 이것은 가장  고급한 사유 능력의 산물입니다. 천박한 양비론, 뭐 이런 유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 원효 聖師의 일심이문(一心二門)에 육박하는 격조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 도치킨스의 무신론을 동시에 논파하는 힘이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나온 게 맞다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필경 뜻하지 않은 또 하나의 화두를 뜻하지 않게 들게 된 셈입니다.   

그가 다시 말합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이 말은 성실하고도 따뜻하며 감동적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성모 마리아가 영혼과 육신을 모두 지닌 채 승천했다는 별스러운 믿음보다 더 상식에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이성적이며 확실하다고 여기는 증거들에 맞서 아직도 이런 정치적 신념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워낙 훌륭한 사상이어서 사회주의 스스로의 자기파괴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게 만들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고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사회주의라는 비전에서 물러서는 일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힘과 능력이라 여겨지는 것을 배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그 비전에는 우리 존재의 저 깊은 곳에 호소하여 열정적인 동의를 끌어내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고,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사회주의의 이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거기서 물러설 수 없고, 버리고 떠날 수도 없으며, 안 된다는 대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161-162쪽)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톤의 말은 앞서 언급한 예수에 대한 그의 태도와 함께 하나의 유장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예수가 선포한 거룩하고 영광된 변모는 비난받고 더럽던 것이 약자에서 강자가 되고, 죽음이 삶으로, 고뇌가 영광으로 바뀔 때 일어난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오랜 명칭은 비극이라기보다 희생이다. 이런 식으로 모퉁이돌이 주춧돌이 되는 되면서 옛 질서의 자투리와 찌꺼기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미래의 참된 삶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우리는 그런 삶이 과연 가능한지.......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비우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42-43쪽)  

예수가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이루고자 한 새 질서,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현실주의적 믿음이 필요한 것과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의 실천에 사회주의적 헌신이 필요한 것의 본질적 일치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혁명-필자)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217쪽) 

바로 이런 태도를 그는 비극적인본주의라 이름 합니다. 이 비극적인본주의가 신이 사회주의를 품는 둥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통속적인 종교(기독교)도, 순진한 도치킨스도, 피상적 사회주의도 "스스로의 훌륭한 전통에 비추어 심판받아야"(177쪽) 진실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속적 종교(기독교)는 왜 "교회가 하느님의 무덤이자 묘실"(니체)인지, 어찌 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키이르케고르)을 할 수 있는지 준열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도치킨스는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내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 자체가  신화"(216쪽)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초월.......의 세계를 직접 이어주는 핫라인"(213쪽)의 깊은 존재를 외면하는 무리들은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영성적 본질을 하루빨리 간파해야 합니다. 

세계를 바꾸는 힘, 즉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 개조는 성찰적 이성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궁극은 아닙니다. 그 이성을 품어안은 사랑 없이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이끄는 동력이 믿음(신뢰)입니다. 바로 이 도저한 역동의 장(場)이 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입니다.  

요컨대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사상과 삶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현실주의(로서의 사회주의) 

(2) 비극적인본주의(로서의 사회주의) 

(3) 성찰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신앙주의(로서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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