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일극 지배 체제가 흔들리고 다극 질서가 부상하는,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의 충돌을 목도하고 있다. 여러 대륙에서 동시다발로 터져 나오는 분쟁과 정치 지형의 변화는 서방 중심 일극 체제가 안고 있던 내적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한복판에 예멘이 있다. 지금 예멘과 사우디 간의 군사적 충돌은 단순한 양국 간 갈등을 넘어 지역 안보와 세계 질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쪽은 사우디였다.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불법적 공격으로 살해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안사르알라(후티) 정부의 조문단을 태운 비행기가 7월 13일 사나 국제공항에 내리려던 순간, 사우디 주도 연합군이 활주로를 폭격한 것이다. 비행기가 급히 인근 호데이다로 회항해 참사는 피했으나, 안사르알라는 곧바로 사우디 남부 아브하 공항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것으로 맞대응했고, 7월 20일에는 ‘눈에는 눈’의 원칙을 내세워 사우디에 대한 해상 봉쇄를 선언했다. 2022년 휴전 이후에도 사우디가 사나 공항과 항만에 대한 봉쇄를 풀지 않아 온 것이 그 배경이다. 9월 들어 안사르알라는 공세를 강화해 홍해 연안과 바브엘만데브 해협 일대를 손에 넣기에 이른다. 10월 5일 사우디가 지원하는 이른바 ‘대통령지도위원회’가 ‘예멘의 새벽’ 작전으로 반격에 나서자, 안사르알라는 리야드 킹칼리드 국제공항과 다란의 아람코 시설을 연이어 타격했다. 사우디와 메카 방위동맹을 맺은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이 군사 지원을 압박받는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도 사우디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전쟁은 세계 권력의 중심축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첨예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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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세계 전체의 지형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적 변동은 저마다 얼굴이 달라서, 어떤 곳에서는 진보 세력이 후퇴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반제국주의 연대가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엇갈리는 흐름들을 한 겹 걷어 내고 보면, 그 밑바닥에는 미국 중심의 일극 질서를 지키려는 세력과 여러 힘의 중심이 공존하는 다극 질서로 나아가려는 세력 사이의 거대한 대결이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남미에서는 진보 블록이 수세에 몰린 형국이다. 10월 4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실바는 45.16%를 얻어, 47.03%를 얻은 우파 후보 플라비우 보우소나루에게 뒤졌다. 25일 결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두 후보는 51 대 49로 팽팽히 맞서 있다. 결과와 무관하게, 남미 좌파가 대중적 기반을 지키는 데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아프리카 사헬 지역은 정반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부르키나파소·말리·니제르는 프랑스를 비롯한 옛 종주국의 신식민주의적 통제에 맞서 사헬국가동맹(AES)을 결성하고, 2025년 1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탈퇴를 매듭지었다. 부르키나파소의 이브라힘 트라오레 대통령이 집권 이후 넘긴 쿠데타·암살 기도만도 최소 다섯 차례에 이른다. 반제국주의 연대와 이를 겨냥한 정치적·경제적 사보타주가 맞부딪치는 최전선이 바로 이곳이다.
유럽의 상황은 모순적이다. 나토를 앞세워 우크라이나 전쟁에 깊이 개입했지만, 치솟는 에너지 비용과 산업 경쟁력 약화로 경제적·정치적 취약성이 극에 달했다. 프랑스의 마크롱과 독일의 메르츠는 바닥권 지지율에도 대우크라이나 지원과 반러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지지율이 마이너스 40대까지 추락한 스타머가 물러나고 앤디 버넘이 총리에 올랐다. 지도자는 바뀌었으나 우크라이나 정책의 큰 틀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몰도바·아르메니아 같은 구소련 국가들은 유럽연합 가입을 내세우며 러시아와 척지는 길을 택하고, 루마니아 등 옛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은 반러 최전선을 자처한다. 글로벌 다극화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집단서방의 쇠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미국과 유럽이 4년 넘게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와 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우크라이나는 지금 사실상 붕괴의 문턱에 서 있다.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더디지만 꾸준히 전진하는 동안 우크라이나는 드론으로 러시아 본토와 항만을 두드리며 반격을 꾀해 왔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인 형편이다. 올여름에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흑해의 수출 항로마저 사실상 막혀, 수출 소득의 절반 이상을 떠받치던 농산물, 그 가운데서도 곡물의 수출 전망이 반 토막 났다. 겨울을 앞두고 발전소와 송전망을 겨냥한 공습이 거세지면서 에너지와 경제도 벼랑 끝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한때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장담하던 워싱턴이 이제 현 전선에서의 휴전을 저울질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서방이 이 전쟁에서 무엇을 잃었는지를 말해준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제국의 반격이 한발 앞서 성과를 거두는 모양새다. 2024년 8월 방글라데시에서는 학생 시위 끝에 15년간 집권한 셰이크 하시나 정권이 무너졌고, 무함마드 유누스 과도정부를 거쳐 올해 2월 총선에서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이 압승했다. 네팔에서도 지난해 9월 이른바 ‘Z세대 시위’로 K. P. 샤르마 올리 총리가 물러났으며, 올해 3월 총선을 거쳐 창당 4년 된 국민독립당(RSP)의 발렌 샤 정부가 들어선 상태다. 부패와 청년 실업에 대한 분노가 시위의 불씨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한 급속한 동원 끝에 미국과 불편한 관계였던 하시나 정권과 친중 노선의 올리 정권이 차례로 무너진 과정은 서방이 여러 나라에서 연출해 온 색깔 혁명의 각본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인도네시아라고 다를 바 없다. 지난해 1월 동남아시아 국가로는 처음 브릭스 정회원이 되고 러시아·중국과 관계를 다져 온 프라보워 정부를 향해, 지난해 8월에 이어 올해 6월에도 만화 <원피스>의 해적 깃발을 앞세운 학생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연료 가격 인상과 재정 운영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 계기였으나, 시위의 칼끝이 다극화로 기운 정부를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배후에 미국의 그림자를 읽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브릭스 창립 회원국 인도로도 이 물결이 번지는 중이다. 올해 5월 실업 청년을 바퀴벌레에 빗댄 대법원장의 발언에 반발해 온라인 풍자로 출발한 ‘바퀴벌레 인민당(CJP)’은 6월 시험지 유출 사태를 계기로 교육부 장관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10월 들어서는 선거관리위원장 퇴진을 내건 전국 캠페인으로 판을 키우고 있다. 모디 정부의 집권 인도인민당(BJP) 인사들은 이를 국경 너머의 ‘영향력 공작’으로 몰아세우며 해외 자금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비판을 음모론으로 덮으려는 상투적 수법이라는 지적이 만만찮다. 그렇다고 미국의 손길을 배제할 일도 아니다. 브릭스에 몸담으면서도 쿼드에 발을 걸치고 이스라엘과 밀착해 온 모디 정부는 일극과 다극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 왔고, 그런 인도를 어느 편에 묶어 둘지에 워싱턴의 사활이 걸려 있다. 배후가 드러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방글라데시와 네팔에서 본 장면이 인도에서 되풀이될 조짐인지 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
동아시아만큼 미국 패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곳도 없다. 미국은 중국의 굴기를 막고자 대만, 필리핀, 호주, 일본, 한국을 규합해 군사 동맹을 강화하려 한다. 그러나 2022년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중국의 대만 포위·봉쇄 훈련은 오히려 상시화됐다. 지난해 12월 말 ‘정의사명-2025’ 훈련에 이어, 올여름에도 지룽항과 가오슝항 봉쇄를 상정한 실사격 훈련이 거듭되었으니, 이제 이런 훈련은 일상이 된 셈이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그리고 올해 이란 전쟁에 막대한 군사 자원을 쏟아부은 미국의 ‘물리적’ 힘은 이제 ‘세계 경찰’ 역할을 떠받치기에 버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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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대륙마다 일극과 다극의 저울이 엇갈리게 흔들리고 있지만, 그 추가 가장 크게,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곳은 서아시아다. 미국의 물리적 통제력이 약화된 자리에서, 이란과 예멘을 둘러싼 분쟁은 세계 경제의 재편을 강제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 이후, 세계 석유·LNG 물동량의 5분의 1이 지나던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막혔다. 6월 이슬라마바드 양해각서가 해협 재개방을 약속했지만, 8월 17일 60일 시한이 아무 합의 없이 지나갔고 해협 통제권은 여전히 다툼 중이다.
이 공백을 메우던 것이 홍해였다. 사우디가 동서 횡단 송유관을 최대치로 가동해 원유를 홍해 연안으로 돌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길목을 안사르알라가 쥐었다. 앞서 본 사우디 항만 봉쇄 선언과 해협 연안 장악으로 이어진 행보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걸프 산유국의 수출로를 동시에 겨눈다. 8월 기준 해협 통과 컨테이너 선박은 2023년 위기 이전의 23% 수준에 그쳤고, 대형 선사들의 수에즈 복귀 계획도 번번이 미뤄졌다.
이는 미 해군이 과거 압도적 물리력으로 보장해 온 ‘항행의 자유’가 더 이상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증거다. 여러 전선을 동시에 관리할 수 없게 된 미국은 글로벌 물류의 두 동맥, 호르무즈와 바브엘만데브 어느 쪽도 지켜내지 못한다. 그 대가는 운임과 보험료, 에너지 가격을 타고 세계 경제 전체에 전가되며,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해양 패권 위에 세워진 달러 중심 경제 체제의 신뢰를 갉아먹을 것이다.
그러나 해협의 주인이 누구냐는 결국 땅 위의 싸움이 판가름한다. 그 싸움이 벌어지는 아랍반도야말로, 세계 곳곳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맞서고 있는 일극 질서와 다극 질서 가운데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지를 가장 먼저,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곳이다. 한쪽에는 반세기 넘게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석유와 달러를 맞바꾸며 서방 질서의 버팀목 노릇을 해 온 사우디 왕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십 년 넘는 공습과 봉쇄를 견뎌 내며 글로벌 사우스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른 안사르알라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우디와 안사르알라의 전쟁은 두 질서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분기점이다.
사우디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다. 전투기 100여 대를 동원한 대대적 공습에도, 소위 ‘정부군’이 모카와 해협 인근 요충지를 되찾았다는 주장에도, 안사르알라는 꺾이지 않았다. 안사르알라는 그 주장을 부인하며 오히려 리야드 공항과 아람코 시설에 탄도미사일과 드론을 쏟아붓고 있다. 10월 6~12일 공항 공격으로만 최소 20명이 숨지고 370명 넘게 다쳤으며, 10개 항공사가 리야드 노선을 멈췄다. 사우디는 자국 방공망이 왜 뚫렸는지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요격 미사일 재고가 압박을 받자 파키스탄·영국·프랑스·이집트에 방어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했지만, 선뜻 응한 나라는 아직 없다. 공세를 시작한 쪽은 사우디였지만, 이제 사우디는 자국 수도의 하늘조차 지켜 내지 못하는 처지다. 안사르알라는 사우디 본토 어디든 상시 타격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주목할 것은 사우디 편에 선 세력들의 태도다. 미국은 이란을 공습하며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란이 틀어막은 호르무즈 해협을 끝내 무력으로 열지 못했다. 앞서 보았듯 이슬라마바드 양해각서마저 시한을 넘긴 마당에, 이란은 오만과 함께 해협 통항 관리 체계를 만들어 수수료를 받겠다고 나섰을 정도다. 미국 패권의 대표적 옹호자인 신보수주의 논객 로버트 케이건조차 5월 애틀랜틱 기고에서 이를 되돌릴 수 없는 결정적 패배로 규정했고, 6월에는 미국이 이미 이 전쟁에서 졌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이런 처지의 미국으로서는 예멘에 직접 뛰어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보 지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7일 출범한 메카 방위동맹의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은 10월 5일 동맹을 처음 발동하고 ‘신속 배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성지 방어 등 방어적 역할에 선을 그었고, 튀르키예 의회는 아직 협정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어느 나라도 예멘 영토 안의 공세 작전에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전 CIA 분석관 래리 존슨이 10월 13일 대안 매체 <트랜지션 프로토콜>에서 진단했듯, 빈 살만은 예멘과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 대가를 석유 시설이 타격받는 가운데 동맹 없이 홀로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우디가 기댈 곳은 결국 어디인가. <트랜지션 프로토콜>의 진행자 줄피카르 알리는 사우디에 파견된 파키스탄군 고위 인사가 리야드 작전실(워룸)에서 이스라엘의 장성급 정보 관계자가 참석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자신 있게 밝히고 있다. 같은 채널에 여러 차례 출연한 페페 에스코바르도 알리와 함께 이 내용을 거듭 확인해 왔다. 리야드 작전실에서 미 중부사령부(센트콤), 이스라엘 장교들과 한방에 앉아 있는 파키스탄 장교들이, 표적 선정에 이스라엘이 직접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직 주류 언론에서 교차 확인되지 않은 증언이지만,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무겁다. 성지 방어를 명분으로 메카 동맹을 발동한 빈 살만이, 동맹국들이 공세에서 발을 빼자, 이슬람권 전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손을 잡는 모험에 나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안사르알라가 장거리 타격으로 사우디 본토를 계속 흔들고, 미국과 동맹국들의 지원이 정보·장비 수준에 머문다면 아랍반도의 권력 지형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이는 이란과의 대결에서 이미 한계를 드러낸 미국이 서아시아 전역에서 영향력을 잃고, 궁극적으로 역외로 밀려날 가능성마저 열어 놓는 셈이다. 예멘 전쟁은 서방과 그에 기대어 온 역내 왕정 질서의 쇠퇴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서방이 자신의 쇠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남은 자원을 쥐어짜 서아시아의 헤게모니 누수를 막으려 할 것이다. 이미 그 징후는 뚜렷하다. 루비오 국무장관이 리야드 공항 공격을 강하게 규탄하며 사우디를 외교적으로 엄호하고 나선 것도 그 하나다.
대이란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고 예멘에도 정면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처지라 해서, 미국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만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황을 되돌리려 한다. 중부사령부(센트콤)에 따르면 7월 14일 이란 항만 봉쇄가 시작된 뒤 135척의 선박이 회항했고, 이란산 원유를 나르는 이른바 그림자 선단 유조선 10척이 파괴됐으며, 사우디에는 정보 지원도 제공되고 있다. 앞서 본 리야드 워룸 증언, 곧 센트콤 인사가 이스라엘 정보 장성과 함께 사우디 작전실에 앉아 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미국이 직접 참전이라는 정치적 부담은 피하면서 이스라엘을 앞세워 사우디의 전쟁을 사실상 지휘하는 구도로 옮겨 갔다는 신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쇠퇴하는 제국이 택하는 전형적인 방식, 곧 대리와 그림자를 통한 반격이다.
앞으로는 홍해 인근의 해상 통제 강화, 이란과 예멘에 대한 고강도 경제·금융 제재가 더해질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역내 수니파 국가들을 결집해 시아파 이란과 맞세우는 전통적인 분할통치 전략도 다시 꺼내 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카드는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 사우디·튀르키예·파키스탄이 맺은 메카 방위동맹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동맹이 10월 5일 발동 성명에서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방어만을 앞세운 것은,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이 사우디의 예멘 전쟁에 공세적으로 끌려들어 가지 않고 방어적 역할에 머물겠다는 선 긋기였다. 더구나 이란은 이 동맹을 반이란 연합으로 규정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지지를 보내 왔으며, 이란 의회 측 인사는 가입 초청을 받아 검토 중이라며 역내 국가들이 스스로의 안보 우산을 찾는 것은 이란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보면 메카 동맹은 수니 대 시아의 종파 전선이 아니라, 미국의 안보 우산 바깥에서 역내 국가들이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는 체제, 이를테면 미국이 빠진 서아시아판 나토의 맹아에 가깝다. 이는 역내 국가 주도의 안보 질서를 내세워 온 중국이 바라는 구도와도 맞아떨어진다. 사정이 이러니 쇠퇴하는 제국에 남은 수단이라고는 역내 대리 세력을 앞세워 혼란을 키움으로써 개입 명분을 새로 만들어 내는, 극단적인 방식밖에 없다.
미국의 약해진 물리력을 간파한 다극화 진영도 치밀하게 움직인다. 이란은 안사르알라에 대한 드론·정밀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과 기술 이전을 강화해 서방의 재래식 전력을 무력화하는 한편, 이미 사우디와 안사르알라 사이의 중재를 제안하며 외교적 존재감도 키우고 있다. 호르무즈를 쥔 이란과 바브엘만데브를 위협하는 안사르알라가 맞물리면서, 걸프의 두 출구가 동시에 서방의 통제를 벗어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이 흔들리는 틈을 타 ‘평화적 중재자’를 자처하며 서아시아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사우디·이란 화해를 이끌어 낸 경험을 살려 두 나라를 상하이협력기구(SCO)와 브릭스(BRICS) 같은 다극 체제로 더 깊이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서방의 고갈된 군사 자원이 서아시아로 계속 분산되는 지금이야말로 우크라이나와 동유럽 전선에서 전략적 우위를 굳힐 절호의 기회다. 여기에 파키스탄이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휴전 각서에 이슬라마바드라는 이름을 새기고, 사우디와는 메카 방위동맹으로 묶여 있으며, 중국과는 ‘철의 형제’라 불리는 우방 관계를 이어 온 파키스탄은 네 나라 모두와 말이 통하는 드문 위치를 무기 삼아 다극 질서에 힘을 싣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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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예멘 전쟁은 21세기 세계 질서의 향방을 가늠할 핵심 고리다. 이 분쟁은 서방이 흔히 ‘중동’의 변방쯤으로 여겨 온 곳의 분쟁이 아니라, 물리력에 기반한 서방 일극 질서가 구조적 한계에 부딪혔음을 알리는 파열음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지원, 그리고 이란 전쟁으로 바닥을 드러낸 미국의 무기고, 대만해협에서 상시화된 중국의 봉쇄 훈련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를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당장 두 개의 시계가 돌고 있다. 25일 브라질 결선은 남미 진보 블록의 운명을 가를 것이고, ‘예멘의 새벽’ 작전의 성패는 사우디가 미국 없이도 자기 뒷마당을 지킬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것이다. 앞으로의 국제 정세는 쇠락하는 패권을 지키려는 서방의 강압과 이에 맞서 연대를 다지는 다극화 세력의 충돌이 상시화되는 국면으로 흘러가리라 본다.
예멘의 흙먼지가 가라앉을 무렵, 세계는 압도적 군사력에 기대어 온 ‘세계 경찰’의 시대가 저물고, 억압받던 글로벌 사우스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낯선 탈중심적 다극 질서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 거대한 전환 앞에서 여전히 한미일 군사협력이라는 냉전의 틀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다.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가 몸집을 불리고 사우디와 튀르키예, 파키스탄마저 미국의 우산 바깥에서 제 살길을 찾는 지금, 저무는 패권의 전초기지를 자처하는 것은 동맹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직무 유기에 가깝다. 다극 질서는 한국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 미래가 아니다. 세계가 새 질서로 건너간 뒤에도 무너진 다리 위에 홀로 남은 나라가 되지 않으려면, 한국은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