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하리는 ‘사막과 초원, 그 경계 어디쯤인 반건조 모래 사바나’다. 이 queer 대지를 생명 방식으로 삼아 살아갔던 시원 인류가 이른바 부시먼이다. 부시먼이야말로 원조이자 전형 풍요를 누렸던 인간다운 인간이었으나 제국과 그 부역 문명에 쫓겨나 빈곤으로 내몰렸다(『호모 부시마니쿠스(정해종)』. 나는 멸칭인 부시먼을 버리고 그들을 호모 칼라하리쿠스라 부른다. 어제 그들 삶을 오늘 내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가 다름 아닌 잿빛 칼라하리라는 사실을. 하여 눈을 돌린 대상은 도시를 점점이, 그러나 맥맥히 흐르는 나무와 풀, 그리고 먼저 삶을 피워낸 태고 생명들이다. 커다란 숲 언저리부터 도심 화분과 그 골목 후미진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이야말로 제국과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는 전사가 아닌가. 저들이 얼마나 장엄하며 또 얼마나 아프고 슬픈지 이제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다니, 나는 얼마나 비루하며 또 얼마나 둔하고 어리석은가. 제국 생활 양식에 젖은 채 저들-이하, 나무를 대표 단수로 쓴다-을 배경으로조차 인식하지 않고 흘러가는 인간 사이 광화문 한 모퉁이에 서서 앙가슴을 두드린다.
나무에 관심 기울이는 깨인 인간조차 나무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초점 맞추어 접근한다. 나쁘지 않으나 모자란다.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태도다. 나무는 다만 인간 도구나 방편이지 않다. 나무는 인간과 동등하게 이 푸른 별에서 한껏 실컷 살아갈 권리를 지니므로 나무 관지에 서 보는 사유와 실천 수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당면한 공통 문제의식으로서 제국주의세(Imperiocene)를 살아가며 제국주의 지배 집단에게 착취·살해당하는 피지배 존재 당사자성에 관해 나무와 식민지 인간 위치를 동일하게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 전제에 터 잡아 상리공생과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모색할 수 있다.
이 전망에서 오늘 여기 호모 칼라하리쿠스인 나는 뭘 해야 하는가? 광화문 벤치에 주저앉아 질문을 포개간다. 어느 순간 나와 눈길을 주고받던 땅바닥 돌이 자기 문양으로 조형해 낸 표정 변화로 말을 건넨다. “고난받는 존재를···” 예? 바로 다음 순간, 마무리다. “응시하고 증언하라!” 구체 방법은 내 몫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거리를 걸어서 나아간다. 도처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사진에 담는다. <도시 나무 비가(悲歌)>가 탄생한다.

돌의 표정1-“고난받는 존재를···”

돌의 표정2-“응시하고 증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