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전 중앙대 교수/ '문화연대' 공동대표)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지난 수백 년, 콜럼버스 일행이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원주민 언어로는 과나하니—섬에 상륙하며 개시된 유럽의 아메리카 침공(1492년)을 기점으로 500년이 넘는 기간 세계질서는 서유럽 중심의 서방 세력이 지배해 왔다. 서방이 15세기 말에 바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도 중국의 청과 인도의 무굴제국, 그리고 오스만제국 등 세계에는 유럽의 개별 국가들을 능가하는 군사적 경제적 힘을 보유한 세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발견의 시대’ 이후 ‘기타 세계’, 즉 수많은 비유럽 지역과 사회들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고 수탈과 착취를 자행하는 제국주의적 지배를 이어온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일찍 발달시킨 서유럽 세력이다. 그 결과 지난 500년 이상의 근대 역사에서 서구 문명이 헤게모니를 행사해 왔고, 그런 흐름은 미국이 서구 세력의 적자로서 세계 헤게몬으로 군림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과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로 등극한 20세기 중반 이후 온갖 패악질과 침략 행위 등 초-국제법적 행태를 일삼아 왔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남미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내외를 불법 납치하여 자국 법정에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하며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암살했다.
하지만 서방 세력이 세계질서를 유린할 수 있던 제국주의적 지배의 역사는 끝나고 있다. 자신의 동맹과 속국들로 형성된 집단 서방을 주도·지휘하며 세계의 지리정치경제적 질서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일극 지배는 이제 글로벌 다수 국가 또는 비서방 세력의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 상태다. 최근 자신이 주도한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두 전쟁에서 미국과 그 동맹이 형편없는 패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방증한다.
2022년 2월에 시작되어 여태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집단 서방이 ‘사실’인 양 세계적으로 유포한 내용이다. 하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미국 중심의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부추겨 러시아를 압박한 데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신나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만든 2014년의 마이단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나, 이후 일어난 우크라이나 내전 종식을 위해 맺은 민스크 협정을 어기고 우크라이나의 군사화를 추진해 러시아를 협박한 것은 미국과 서방 세력이다. 하지만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를 분해해 서방의 자원 식민지로 만들고자 러시아의 전략적 패퇴를 노리며 자신들이 유발한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및 EU,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무참한 패배를 앞두고 있다. 개전 4년 반이 지난 지금도 서방의 주류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하거나 적어도 전황을 교착상태로 이끌고 있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그런 가짜뉴스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지금 동서남북, 육해공 전면에서 수세에 몰려 조만간 수도 키예프가 러시아의 공격권에 들어갈 전망이며, 바다로의 진출이 막힌 내륙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빠졌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군사 강국들이 전력을 다해 지원한 결과라는 점에서 서방 군사력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준다.
미국의 쇠퇴는 올 2월에 이스라엘과 함께 벌인 대이란 전쟁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미나브의 초등학교를 폭격하여 어린 여학생 170여 명을 죽이고, 이란 지도부에 대한 ‘참수작전’을 통해 최고지도자와 그의 어린 손녀를 살해하고, 병원과 사원, 체육시설 등 이란의 민간 시설을 대거 파괴하며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이란 공격의 실질적 목표인 석유 자원 약탈 야욕은 숨긴 채, 이란 지도부 제거 및 정권 교체, 핵 프로그램 종식, 군사적 위협 제거 및 군사 인프라 파괴 등을 공식적 목표로 내세웠으나, 어느 것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반대로 페르시아만 일대에 배치된 미군기지들의 고가 레이더 시설과 각종 군사 자원이 이란의 막강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아 대거 파괴되고 미군 병력이 피신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을 뿐이다. 애초 미국은 안보 보장을 약속하며 페만 제후국들(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에 군사기지를 건설했으나, 그들 국가는 영토 일부를 미국의 대이란 공격 발진 기지로 내준 탓에 미사일 공격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해 산유 및 정유시설 피격, 호르무즈 해협 통제로 인한 수출길 봉쇄, 석유 수출과 연동된 페트로달러 체제의 해체 위기, 식수 안보 위협 등을 겪게 되었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한 대가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은 페만 국가들은 이제 지역 내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더 이상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국이 먼저 이란에 휴전 협상을 요청하고, 이란의 요구를 담은 양해각서(MOU)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끌수록 이란의 전략적 승리와 자국의 패배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양해각서를 무시하며 여전히 이란 응징을 떠든다. 하지만 패트리엇 등 정밀유도 미사일이 바닥나고 인도양에 배치된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서 병사들의 자살 시도 증가가 보고되는 등 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바야흐로 서세동점의 시대, 즉 서방 제국주의가 세계질서를 유린하던 역사적 시대는 저물고 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시작된 일극적 세계질서의 시대—미국이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내세우며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하던 시대—역시 종언을 고하는 중이다. 그 대신 ‘다극 질서’가 떠오르는 역사적 변곡점을 맞아 미국은 지금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근래에 미국이 글로벌 다수 국가에 폭력적 침탈을 일삼는 것도 자신의 헤게모니가 이전 같지 않아서 비롯된 행태일 것이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나토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패전을 거듭하며 내륙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빠졌고, 서아시아에서 미국이 자국의 ‘공격견’ 이스라엘과 힘을 합쳐 이란을 침공했으나 이란의 완강한 저항을 맞아 진퇴양난에 빠진 것을 보면, 일극적 세계질서는 한계에 봉착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세계질서가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징표가 아닌가 한다. 헤게몬이 일방적으로 국제질서를 유린하던 제국주의적 질서가 후퇴하면, 세계는 더 평화롭고 더 정의로우며, 공영 발전을 이룰 더 좋은 조건을 맞을 수도 있다.
미국 주도 서방 세력의 군사적·지정학적 패퇴 밑바탕에는 일극적 세계질서 아래 작동해 온 경제적 모순이 자리한다. 오늘날 제국주의의 쇠퇴는 서방 자본주의가 추구한 축적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강력한 징후다. 최근 중국의 굴기로 대표되는 브릭스(BRICS) 등 비서방 다수의 경제적 부상도 그런 점을 말해주고 있다. 다극 질서의 부상은 단순히 패권의 이동을 넘어, 세계 인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미국 주도의 일극 질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물질대사, 즉 화폐가 화폐를 낳는 가공자본의 투기적 순환(M—M’)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반면, 브릭스가 추진하는 다극 질서는 산업자본의 운동이 중심이 되는 실물적 자본 순환(M—C—M’)이 지배하는 질서다.
양자의 차이는 명확하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적 대사는 차관 형태의 부채와 이자율이라는 추상적 굴레로 교역 관계를 압도한다. 미국은 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에 자국이 유일한 거부권을 행사하며 통제하는 IMF의 구제금융을 빌미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해, 천연자원과 핵심 공적 자산을 강제로 민영화하게 만든다. 한국도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각종 공적 자산을 민영화했고, 또 외국 금융자본을 위해 국내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해야만 했다. 미국은 IMF 등을 통해 획득한 각종 자산, 자원에서 발생하는 현금 흐름을 증권화하여 월가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탈취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피수령국에 강제되는 살인적인 재정 긴축은 공공부문 사영화와 노동 유연화를 낳아 소자본을 파산시키고 하층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IMF 위기를 겪으며 한국의 인민도 그런 고통을 충분히 겪었다. 미국 금융자본의 행태는 구제금융 수령국의 사회적 기반을 유린하며 그 인민의 삶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미국 내부에서도 탈산업화와 실질임금 하락이라는 참담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이 과정에서 대금융자본가에 의한 세계 부의 탈취가 일어나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갈수록 부가 극소수의 수중에 집중되는 추세다. 일론 머스크라는 개인의 보유 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섰다는 믿지 못할 보도가 최근 나온 바도 있다.
반면, 브릭스 및 글로벌 남부 국가들 내부의 교역은 가공자본의 폭주가 억제되고 구체적인 사용가치의 교환을 중심에 두는 실물 중심의 지정학적 형태를 띤다. 이러한 실물적 교역망 구축은 근본적으로 그들 체제가 비자본주의적이어서라기보다, 서방의 고압적인 금융 제재 및 달러 무기화에 맞서서 자국의 산업자본과 실물경제를 방어해야 하는 지정학적 생존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최근 급증하는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교역 방식을 살펴보자. 러시아가 중국에 주로 수출하는 것은 에너지다. 양국의 교환에서 러시아는 이 에너지(C)를 수출하여 획득한 자국 통화나 위안화(M)로 중국의 실물 공산품(C)을 수입한다. 이 교환에서 화폐(M)는 표면적으로 구체적 사용가치의 맞교환을 성사하는 회계적 수단으로만 기능한다는 점에서, 가치 증식(M—C—M’)의 강박보다는 본원적인 단순 상품유통(C—M—C)이나 물물교환(C—C)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실물적 성격이 짙다. 2024년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제16차 브릭스(BRICS)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제안하여 현재 설립 준비 중인 브릭스 곡물 거래소는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와 최대 소비국인 중국·인도가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의 달러화 가격 지표에 의존하지 않고, 물리적 물량과 필요에 기반해 직접 곡물과 비료를 거래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할 전망이다.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현란하게 나타나는 달러(M) 수치가 세계 빈국 인민의 기아 상황을 규정하는 식량 가격을 지배하는 작태가 M—M’의 논리로 실물을 통제하는 구조라면, 브릭스 곡물 거래소는 곡물 가격의 결정 기준을 가상의 신용에서 물리적 물량과 신체적 필요, 즉 사용가치의 실물적 기초 위로 옮겨오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급증한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교역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방의 고압적인 금융 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통화 스와프와 직거래 비중을 높이며 달러 패권을 우회하는 이 대안적 교역의 전형적 사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시코마인스(Sicomines) 합작 사업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이 구리와 코발트 같은 천연자원을 담보로 제공하고, 중국이 그 대가로 도로·철도·발전소 등 필수 인프라를 지어주는 이 교환 방식은 투기적 가공자본 운동(M—M’)과는 전혀 다르게 물물교환(C—C)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실물적 성격이 짙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교역 역시 자국의 산업적 축적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완벽히 비자본주의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순환 구조(M—C—M’) 안에서 화폐는 자기 증식하며 지대를 수취하는 가공자본으로 군림하는 대신, 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의 생산과 조달을 위한 매개체로 철저히 통제된다. 금융자본주의의 추상적이고 파괴적인 폭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궤적이다. 결국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쇠퇴, 그리고 브릭스를 위시한 비서방 다극 질서의 수립은 폭력적인 M—M’의 굴레를 끊어내고 실물과 사용가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와 대안적 물질대사가 싹트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극 질서가 해체되고 다극 질서가 수립되면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지고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릴까? 오늘날 다극 질서를 추진하는 브릭스 등 글로벌 다수 국가의 부상이 지난 500년 이상 세계를 유린해 온 서방 제국주의 지배를 극복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현실이 어떻게 전개될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않고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세계대전을 일으킬 우려도 없지 않다. 게다가 다극 질서가 구축된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극 질서를 추진한다는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고, 인도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의 지배가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국가의 권위주의적 지배가 작동한다. 그래도 M—M’의 약탈적 자본 운동이 지배하는 것보다는 그 내부에 C—M—C와 C—C 순환을 내장한 M—C—M’의 순환이 지배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길을 앞당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 질서 아래 사회적 물질대사를 지배하는 M—M’ 순환이 전적으로 투기적이고 약탈적이라면, 다극 질서를 지향하며 이뤄지는 물질대사(M—C—M’)는 사용가치의 생산과 그것을 둘러싼 교역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단, 비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앞당기려면 다극 질서를 추진하는 각국에서 내부 개혁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거대 국가 자본의 주도로 구축되고 있는 이 대안적 실물 인프라와 자산들이 훗날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통제’로 넘어갈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될 때만 다극화는 진정한 체제 변혁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스트번 메자로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싶다. 메자로스는 『자본을 넘어(Beyond Capital)』에서 오늘날의 사회적 물질대사 양식을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려면 “공동체적 생산과 소비의 물질적·제도적 형태를 실천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핵심이며, 그래야만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의 발전이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이때 기존의 구질서가 가동시킨 “위로부터의 의사결정 구조”(레닌주의 정당, 현실 사회주의 국가 등)가 수행할 수 있는 “역사적 기능은 자율적 자기-관리의 탄생을 돕는 산파 역할”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국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국가는 대중의 사회주의적 의식 고양을 위해 자신의 역사적 기능을 “자율적 자기-관리의 탄생을 돕는 산파 역할”에 국한할 수 있을까? 즉 국가로서의 자기 해체를 주도할 수 있을까? 결국 그 대답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선의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톱다운 경제 구조 아래서 억눌려 온 기층 노동자들의 투쟁과 협동조합적 실천 등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얼마나 거세게 자율적 관리를 요구해 낼 것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