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지 40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몸 상태가 아직 온전하지가 않다.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쾌적한 감각은 대부분 돌아왔지만, 체중이 여전히 50kg 근처에서 맴돈다. 회복세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래도 안심하면서 마치 사골을 고듯 차마 버릴 수 없는 자투리 곡절 거두기로 솟을굿 채비에 갈음한다.
자투리 곡절이라고 했으나,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지해 온 반인간중심주의에 경도된 표현일 수도 있다. 인간인 한 인간에서 출발한 표현을 써야 자연 이치에 부합한다고 한다면 미상불 가장 근원에 해당하는 곡절일 테다. 이 이야기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는 이번에도 독서였다. 동시성 작동이다.
우연과 필연이 맞물린 경계에서 내 눈길을 붙잡은 책은 재키 히긴스가 쓴 『감각의 신세계』였다. 글쓴이가 다른 사람을 인용한 한 문장이 돌연 나를 불러 세웠다. “어머니로부터 받는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가 하는 감각을 우리 안에 새겨넣는다.” 이 어인 말인가?
여기 보살핌의 손길은 추상적 의미 돌봄을 뜻하지 않는다.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는” 또 다독거리거나 포근히 감싸안는 피부 접촉을 뜻한다. 이 접촉이 “자기 몸에 대한 소속감,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 유대, 애착이라는 연속성에 매몰돼 있던 통념을 단칼에 자른다.
이 접촉은 모유 수유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최초 작동한다. 모유 없이 시생대를 보낸 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엄마까지 안아주거나 업어준다고 다가오면 손을 내저었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들과 내를 누비며 비인간 존재와 마주해 살았다. 이 자타 분별 범주 변이도 우울증 고갱이다.
어머니에서 출발한 부드러운 피부 접촉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건강한 자아 정체감 형성을 넘어 삶이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다는 진실을 “느끼게” 한다. 이 느낌에 둔해지면 놀이로서 삶이 전해주는 재미에 흥미를 잃게 된다. 재미에서 멀어지면 의미로 보상받기 마련이다. 진지와 엄숙도 우울증 고갱이다.
피부 접촉을 통한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는 생명 안전감을 보충하고 증강한다. 이 길이 근원에서 막히면 자기 생명 자체를 “불안전”으로 느끼는 존재론 차원 불안에 빙의(possession)된다. 이 빙의 불안은 인격으로 파고들어 살고자 하는 원초 감응을 삭제한 채 우울과 동맹한다. 여기가 우울증 골갱이다.
우울증 골갱이는 모든 접촉에서 고립된다; 가장 깊은 정신장애, 아니 ‘심신’ 장애, 아니 ‘영(靈) 생명’ 장애다. 재키 히긴스는 다시 그 사람을 인용한다. “저는 접촉이 정서적 탐닉이 아니라 생물학적 필수 요소라고 봅니다.” 아파서 고아 낸 시간이 알려준 엄밀 섬미(纖微)한 진실이다. 이 진실을 살고 싶다.
이 진실을 살아갈 때 나는 비로소 마지막 그리움에서 온전히 놓여날 수 있다. 모유 결여는 내게 질기디질긴 물 그리움-허갈(虛喝)-과 당 그리움-허기(虛飢)-을 가져다주었다. 이 둘은 각각 다르게 뒤떠들다 마침내 알코올 애착으로 수렴했다. 알코올 애착은 우울장애와 찰떡궁합 죽맞아 50여 년간 함께했다.
알코올 애착과 정면으로 마주해 70년 동안 얽히고설켜 온 온갖 고통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내 삶은 모름지기 카덴차를 남겨 놓은 협주곡 상태로 들어설 테다. 내 인생 계통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이끈 숲 정령들께 가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지난 40여 일 다시없이 힘들었고 더없이 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