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賜牌)는 조선 시대 임금이 궁가(宮家)나 공신에게 산림이나 토지를 하사하는 일이다. 경기도 양주와 의정부에 걸쳐 있는 산이 사패산인데, 선조가 6번째 공주인 정휘옹주에게 혼인 선물로 이 산을 주어서 생긴 이름이다. 해발 552m 화강암 덩어리 골산(骨山)이다. 그동안 마치 오봉산처럼 도봉산 일부로 여겨 따로 걸을 생각 내지 않다가 지도에서 골짜기들을 발견하고는 작심한다. 사패산은 골짜기 넷을 거느린다: 범골, 안골, 울띄골, 오야골. 오늘 이 넷 모두를 걷기로 한다. 20km가 넘을 듯하니 시간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차질이 빚어질지도 모른다.

 

회룡역에서 내려 호암사 가는 길을 따라 먼저 범골로 들어간다. 골짜기 이름이 왜 범일까? 다른 자료는 없고 호암사 호암(虎巖)이 범바위니까 아마도 이 골짜기에 범이 살았나보다 추측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호암사 바로 뒤에 범이 살았을 만한 바위굴이 있다. 절에서 그랬는지 출입을 막아 놓았다.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조금 가파르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을 걸어 범골 능선에 다다른다. 지도로 확인하니 사패산 정상을 오른쪽에 두고 오야골로 내려가 송추역 근처에서 점심 먹은 뒤 울띄골로 들어가는 일은 시간상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길을 바꾼다.


 

사패 능선과 만나는 지점 1/3쯤 전에서 오른쪽 작은 능선을 타고 안골로 내려간다. 골바닥에 닿아 왼쪽으로 따라 올라가면 성불사가 나온다. 절을 구경 생각은 없으나 안골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 보려고 절집을 가로지른다.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하릴없이 내려오다가 안골 폭포를 만난다. 신기하게 하얀 암반 위로 조그만 물줄기가 재잘거리며 흘러내린다. 철이 철이니만큼 아쉽지만 한참이나 눈에 담아두고 음식점을 찾아 내려간다. 혼자 먹을 음식이 없는 유원지 식당 몇을 지나 겨우 설렁탕집을 발견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던가, 역대급 맛이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안골로 되들어가다가 오른쪽 능선 산너미길을 따라간다. 바로 여기가 북한산 둘레길 14구간인데 풍경 좋다고 소문 자자한 길이다. 나는 능선길을 본능으로 싫어하나 이 길에서는 그런 마음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울띄골로 내려가는 지점부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직은 바싹 마른 겨울 모습이지만 물과 돌, 그리고 나무가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이 참으로 정겹고 곱다. 다른 철에 꼭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한다. 풍요롭지는 않으나 돌돌 흐르는 도랑물로 오랜만에 물 모심까지 한다. 물이 가는 길에서 멀어지는 인간 언덕길로 올라간다.


 

다시 숨 고르고 지도를 열어 살핀다. 오야골 가는 길을 살피기 위해서다. 어라?! 내 발밑에 굴 하나가 지나간다: 사패산 터널. 산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가는 광폭(편도 4) 쌍굴 터널이다. 지역 주민은 물론 환경 단체, 불교계가 일제히 들고일어나 반대한 까닭이다. 과연 얼마나 중요한 도로인지는 모르지만, 특히 박정희 이후부터 사악한 제국 부역자 집단이 장악한 대한민국 토건 현실에서 볼 때 흑막은 없을 수 없다고 본다. 본디 길이 지니는 쌍방 소통은 가로막히고 효능과 권위만이 일방으로 질주하는 터널 위에서 나는 돌연 허공으로 둥둥 떠오른다.


 

정신을 다시 주워 담고 내려와 오야골로 들어간다. 자두 옛말인 오얏과 관련된 이름 아닐까, 짐작하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잘 닦여진 길 왼쪽으로 내려다뵈는 제법 깊은 골짜기 내는 돌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닥이라 건천(乾川) 상태다. 한참 올라가니 원각사가 나온다. 흔히들 부르는 이 골짜기 이름이 기원한 절이다. 그냥 지나친다. 조금 뒤에 쏠 하나가 나타난다. 여기도 자질자질하나 물 많을 때 드러낼 모습과 소리를 상상하도록 이끄는 힘에 이끌려 이슥히 바라본다. 사패 능선 향해 더 올라갈 며리는 없다고 판단해 발길을 거둔다. 5시간 걸어 마무리.

 

오늘 골짜기 넷을 더하면 5년간 서울 안팎 계곡 60곳을 걸었다. 놓친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모든 골짜기로 들어가라라는 말에 여정히 값하는 여정이었다. 왜 굳이 골짜기를 걸었나? 능선과 달리 계곡에서는 비인간 생명인 버섯(곰팡이돌꽃··나무, 그리고 비생명 흙···바람들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마주하여 교감할 수 있어서다. 이런 내 행동은 제국주의 생활 양식 가운데 하나인 등산이 아니다; 내 몸에서 공생하는 섬세 생명과 더불어 더 널리 생명과 우주를 만나는 잔치제의. 숲에 홀로 들 때, 함께 들 인간 벗을 그리는 며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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