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일 나는 성내천을 거슬러 걸었다. 청량산 허리께까지 닿아 그 발원지를 가늠만 한 뒤 시간에 쫓겨 되돌아왔다. 그 정도면 됐다고 여겨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길을 내려왔다고 썼다. 오늘 그 길에 다시 선다.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계곡을 다 걷고 그 너머에 있는 고골 계곡까지 걸어 나올 참이다. 지하철 5호선은 강동역에서 갈라져 마천역과 하남 검단산역을 종점으로 하는 두 노선이 있다. 마천역에서 출발해 계곡 둘을 걸어 하남 검단산역으로 가는 경로다.

 

다시 성내천 계곡을 향한 며리가 있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어 끊어진 인연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람 하나 있다. ‘모든 인연은 배반으로 끝난다(김종철 선생)’, 누구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려우나 꼭 그러자면 내 잘못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바 나는 미숙했고 투미했다. 못된 탐욕이 있지는 않았으나 숙의에 실패했다. 오늘 아침 홀연 그와 그가 살던 곳이 떠올랐다. 그가 내 생에 남긴 무늬를 기리며 내가 그 생에 남긴 얼룩을 뉘우치고자 하는 결심이 서늘 포근 들었다.

 

그가 건강하게 살아가길 삼가 빌면서 발걸음 기억 좇아 청량산 성내천 발원지로 가는 계곡에 든다. 쉽게 가는 능선길을 마다하고 계곡 물길을 따른다. 어느 순간 길은 능선으로 방향을 튼다. 물을 따라가서는 길이 안 된다고 먼저 간 이들이 판단한 결과일 테다. 나는 결연히 물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늘 그렇듯 이렇게 일부러 길 밖으로 나가는 찰나부터 두려움, 아뜩함, 그리고 기이한 설렘이 갈마든다. 비와 땀에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 발원지를 향해 길을 만든다.

 

안말내(성내천) 습원

 

얼마나 헤맸을까깨진 기왓장 하나가 눈으로 와락 뛰어든다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능선 이룬 남한산성이 저 멀리 어룽어룽 보인다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주위를 찬찬히 살피니 뚜렷하지는 않으나 성내천 처음 물을 머금어 흘려보낼 만한 조그만 습원 있다예를 표하자 편안한 심사가 되어서는 쉽게 에돌아가는 비탈길로 방향을 튼다드디어 연주봉 옹성 암문 근처에 다다른다이렇게 헤맨 탓으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다내쳐 고골 계곡으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전승문(남한산성 북문)

 

북문 아래 식당에서 산나물 없는 산나물’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는다주인장은 손님에 별 관심이 없고 식당 한복판에 친구들과 앉아 낮술 판 벌이며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해댄다이렇게 번 돈으로 그렇게 누리는가 보다아무렴남한산성이야 한낱 유원지지 역사는 무슨무심히 일어나 북문으로 간다정조대왕이 전승문(全勝門)이란 이름은 내렸으나 현액을 내리지 않아 나중에 채자(採字)로 달았다고 한다역사는 종종 이렇게 아퀴를 나중에 맞추며 흘러가기도 하는가보다.



북문에서 내려가는 고골은 광주 옛 읍치(邑治)라는 뜻이다. 한강을 끼고 있어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온조가 세운 백제 요지기도 하다. 고려 건국공신 왕규가 본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조선 때는 남양주 둔지나루, 광주 창모루를 통해 모인 식량을 고골 사창(司倉)에 보관했다가 등짐으로 남한산성까지 날랐다. 그 길이 세미(稅米)길이다. 세미길을 내어준 골짜기가 바로 고골 골짜기다. 고골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내가 오늘날 덕풍천이다. 고골은 유구한 역사 그 자체다.


고골내(덕풍천) 물소리를 처음 들은곳


골짜기 아래 펼쳐진 벌은 둔전(屯田)이 있었을 만큼 넓다. 그런 역사와 지정학이 사라진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안정된 농촌도 아니고 가지런한 도시도 아니며 하다못해 무슨 공업단지도 아니다. 건성드뭇이 자리 잡은 각종 건물 탓에 어수선하고 너절하기까지 하다. 식민 통치와 부역 국가 난개발 과정에서 교통 주변부로 내몰리며 눈 밖으로 밀려난 듯하다. 최근 공공주택 지구로 지정되어 목하 폐허가 되고 있다. 덕풍천 중상류 살풍경도 똑같다.


이 폐허는 또 다른 폐허를 낳지 않을까? 


덕풍천을 따라 걷는 내내 심사가 편치 않다. 성내천에 이름 빼앗긴 안말내처럼 여기 고골내도 웅숭깊은 역사를 되살려 내기에는 너무도 살뜰히 더럽혀졌다. 공공주택 지구 토건이 끝난 다음 여기는 어찌 변해 있을까. 이 토건에 공공연히 침투했을 부역 자본 정체를 아는 나로서는 몹시도 비관할 수밖에 없다. 저들이 역사와 자연을 공경할 리 없다. 오히려 망가뜨려야 종주국에 바치는 충성이 되니 기를 쓰고 압살하리라. 각성한 시민이 굳세게 맞서 싸우기를 간절히 빈다.

 

다섯 시간 동안 안말내, 고골내 골짜기를 잇는 해발 500m 고개를 넘어 물경 20km를 걸었다. 천추 아래 모든 근육이 아프지만 내일 피곤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내가 숲과 더불어 반제 전선을 이루는 이 제의가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검찰개혁이 그런대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개혁 대상한테 개혁을 맡겨 놓고 휘청댄 개혁 주체는 아직도 저들이 혼을 제국에 판 악령 존재라는 진실에 귀 닫고 있다. 반성하고 책임져야 한다.

 

숲으로 떠날 때는 사사로운 계기가 작동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게 숲은 사사로움 너머까지 번지는 지평이므로 서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문과 공부가 더해져 내 삶을 확장하고 증언하는 일이 빠져서는 안 된다. 당연히 돈 되는 일과 반대 방향이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고결을 내려놓고 각별한 수치심을 지닌 채 안절부절못하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삶이 선한 사람을 만든다. 비록 순댓국에 소주 한 잔일 테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를 빛접게 그리며 지하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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