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컨대 내가 한 영화를 작정하고 다시 본 적은 단연코 없다. 오늘 케데헌을 두 번째 본다. 세 번째 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싶으니 다따가 앉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바다 같은 원효 이야기로 끝낼 참이었다. 어디에선가 도랑물 졸졸거리는 소리를 여돌차게 들은 듯 옴나위없이 영화에 끌려든다. 에나, 머선129?

 

먼저, 루미가 무당이라는 설정은 내게 각별하다. 40대 중반에 수능 다시 쳐 한의대 입학하고 50대 초반에 정신장애를 숙의 치료하는 한의사가 되면서 나는 자신을 무당으로 여기며 여태까지 살았다. 나무 풀, 그러니까 숲 공부할 땐 풀빛 무당(Green shaman)이었다. 그 다음엔 달·물 무당이었다. 이젠 먼지 무당이다.

 

무당은 마주 가장자리에 선 중재자다. 이렇듯 쉽게, 편하게만 보고 말면 원효에 범한 오류를 답습하고 만다. 루미는 악령 정체성도 지닌다. 그는 단순한 무당이라기보다 신화 속 Trickster, Maleficent; 거북섬(북아메리카) 토착민 설화 속 나나보조/마나보조다. 루미가 품은 고뇌와 긴장은 순혈선이 뭔지 묻는다.

 

순혈주의 선한 영혼이 혼혈 세계를 구해 순혈 세계로 만드는가? 순혈주의 선한 영혼만이 순혈주의 악한 귀마를 이기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독선, 그러니까 절대 선은 절대 악과 무엇이 다른가? 질문이 여기에 닿는 찰나 허/무로 떨어지고 말지 않는가? 고결을 전유하는 독선은 세계를 사랑도 구원도 하지 못한다.

 

눈 덮인 도봉산 회룡계곡에서 길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며 헤매다가, 나 또한 제국주의에 잠겨 악한 삶을 살았다는 진실, 그러니까 부역자 본성과 홀연히 마주쳤다. 그전까지 나는 순혈 반제 전사로 자처하고 왜미(倭米) 제국에 부역한 매국노를 향한 선한증오와 적개(敵愾)만으로 일관해 살아왔다. 틀렸다. 잘못됐다.

 

폭포 물 떨어지는 벼랑 위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통곡했다. 비록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나 또한 엄연한 부역자라는 깨달음 뒤에야 비로소 내 삶은 원효를 참으로 닮아갔다. 케데헌이 내 영혼을 붙잡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도봉산과 벼랑 위 소나무가 강용원 소도듯 남산과 서낭나무는 루미 소도다. K-무의식이다.


 

케데헌 본 뒤 나는 숲에 든다. 전과 달리, 나무가 건네는 말을 들으며 걷다가 이드거니 서 있기를 거듭한다. 상처 입은 나무가 분기하며 남긴 지피융기선 화살표 방향을 살펴 운명을 예측한다. 아래로 향하면 위험하고 위로 향하면 안전하다. 내 인생 분기는 어떤 융기선을 남겼을까? 내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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