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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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관점에서 우리는 요가 수행을 통해 정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불가지론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융은 그런 초월을 단지 원형적 주제로만 생각했고, 엑스타시를 위한 욕망이라고 했다. 따라서 융에 따르면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 신과 연합함으로써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일은 단지 원형적 충동 표현일 뿐이다.(298~299)

 

(융이 만나기를 단념했던-인용자 붙임-)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도 베단타 대표였다. 그 전통은 정신이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수준 실재라고 이해한다. 베단타에서 절대자와 같은 본성을 지닌 초월적 자기와 합일하는 일은 영적 탐구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도달하는 결론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정신적 삶과 그 대극들에 감금된 상태로 정의한다면, 이런 합일은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이 사실이다. 참된 본성에 대한 자아 방해를 해체할 때, 완전한 자비 개화, 지고한 인간 사랑이 이루어진다. 융은 어떻게 그런 비범한 성취를 재미없다고 불평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을까?

 

심층심리학과 인도 사상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라면 융의 이 같은 태도에 깊이 실망할 수밖에 없다. 두 전통 학생들은 융의 오만함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301~302)

 

 

바야흐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다. 맨스필드가 융이 오만해서 후학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고 질타하는 장면은 독자 관지를 분명히 하라 도발한다. 과연 누가 오만한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쓴 R. 뿔리간들라 인도철학주해리뷰(2010. 11.23.) 일부를 세부만 수정해 가져온다.

 

이 책은.......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 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타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타의 일치를 말합니다.......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적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적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입니다. 붓다에게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 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립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 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맨스필드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실패했음을 먼저 지적한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라고 함으로써 네 사람, 그 중 특히 붓다와 상카라를 한꺼번에 싸잡아 말한 실패가 뼈아프다. 상카라는 베단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베단타가 불교 영향을 받았으므로 시간관과 역사관정도에서 일치를 보일 수는 있으나 근원에서 둘은 일치하지 않는다. 정통 비정통이 문제가 아니라, “불멸의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느냐가 문제다. 붓다는 인정하지 않고 상카라, 그러므로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정한다.

 

맨스필드는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비범한 성취를 인정함으로써 베단타 편에 선다. 그러면서 어떻게 붓다를 거론하는 실패에 눈감을 수 있었나? 또 다른 실패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거론한 이른바 중도불교는 귀류 논증을 토대 삼은 티베트 중관 불교를 의미한다. 다른 나라 불교도 마찬가지거니와 티베트 불교는 워낙 복잡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밀교 수행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은 분명하다. 밀교 수행을 통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엄밀하게 말하면 철저하게 을 관철하는 중관 사상과 배치된다. 사실 다른 대승불교 현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으며, 이점을 날카롭게 인식하지 않는 한, 을 낳은 붓다 적 전통은 끊어진다. 적 전통이 끊어진 곳에 무슨 불교가 있나. 맨스필드 근본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실패가 있다. “신과 연합함으로써” “정신을 뛰어넘을”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에 이른다고 할 때, 신은 무엇인가? 정신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육체(물질)를 가로지른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반대라면 어떻게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가, 그 인간은 무엇인가?

 

마지막 논점 하나를 남기고 중간 결론을 내리면 맨스필드는 인도 사상에 대한 기본적 무지와 티베트 불교와 맺은 인연 때문에 중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극 합일을 아리안-힌두 전통 베단타가 주장하는 완전한 불이론nondualism’에 내주었다. 아니 자신이 속한 전통을 확인한 여정일 수도 있다. 양자물리학이 DNA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제는 정녕 그가 생물학을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오만이 오류를 부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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