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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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회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유아화 현상은 교양 붕괴라는 또 하나 징후와 근본에서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교양이 지닌 가치가 이 정도로 폭락한 일은 근대 이후 처음 있는 사건 아닌가 싶습니다.......교양이란 쉽게 말하면 어떤 사실을 그와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또는 어떤 사실을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사실과 맥락지어 다시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교양은 넘쳐흐르는 무엇입니다. 수습되지 않고 제어되지 않아 자기 지적 구조 자체를 무너뜨릴 만큼 밖으로 향하는 근원적 외부지향성을 띠고 있습니다.......교양은 많을수록 수습이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교양은 자기 지적구조에 끊임없이 변경과 버전 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교양은 항상 한계를 넘어서려 합니다. 교양은 늘 미지 영역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교양은 인간이 조용히 만족하는 짓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교양이 방해한다는 말은 정말입니다.(121~122)

 


표준국어대사전은 교양을 이렇게 정의한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고려대한국어대사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가? 우치다 타츠루가 제시한 정의와 비교하면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결국 잡학다식을 뜻하니 대뜸 걷어내야 할 판이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는 흔히 교양 있는 사람이라 말할 때 풍기는 통속한 뉘앙스를 그대로 따른 사전답지 못한정리-정의가 아닌-이므로 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전 만드는 자들 태도가 영 시답지 않아 보인다. 사전은 언어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태도를 결집한 메타텍스트다. 메타텍스트를 구성하는 자들 태도 또한 메타적이어야 한다. 자기 위치와 직업을 다만 도구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위상을 중심으로 윤리적 존재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능력이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교양이다. 교양 없는 자들이 만든 사전이 오죽하랴 싶으니 서글플 따름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교양은 그가 줄기차게 논의하고 있는 복잡한 세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견디는 지성을 향하고 있다. 그 지성은 비대칭대칭 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한다. 그 참여는 다른 맥락과 엮이고 다시 다른 맥락과 엮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무한나선순환 네트워킹을 열어간다. 화석으로 수습되기를 거부한다. 기계로 제어되기를 거절한다. 내적 침잠과 경지 등극에 저항한다. 내파와 탐색과 동요를 거듭 일으켜 주저앉은 영혼을 들쑤신다. 삶이 배움 또는 자람의 동의어임을 증명한다.

 

교양은 그리하여 어른의 길이다. 어른 가치가 폭락한 사회는 아이 참주가 접수한다. 아이 참주 사고와 언어는 외 방향 파편이다. 그 파편을 생산하고 유포해 사회를 장악하는 유아 집단이 바로 언론이라는 맹랑한 이름을 가진 지라시·팸플릿 공장이다. 현대문명이 망한다면 오로지 지라시·팸플릿 공장 탓이다. 특히 우리사회는 매판 지라시·팸플릿 공장 카르텔이 사회 유아화를 주도하고 그 과실을 독식한다. 교양 붕괴 시대를 선도하는 유아 과두가 유아 대중을 착취해 찬란해진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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