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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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이라도 소란스러움은 소란스러움이고, 고요한 울림은 무명성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말하는 개체와 개체를 다 같이 품은 우리 모두에게 흐르고 있는 어떤 커다란 언어 신체, 즉 우리 모두를 잇는 ()’일 때 일어납니다.......그래서 어떤 강한 말은 단순한 음성이나 문자기호라는 레벨에 머물지 않고, 간주관적 몸 안으로 배어듭니다. 이를 매개 삼아 말로 묶인 공동체 전체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100~101)

 

말이 지닌 근원 기능은 주문에 있다(_시라카와 시즈카)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영적 존재에게 축복을 보내고 주술을 거는 일이 말이 지닌 본래 힘이라는 뜻입니다.......

  문학비평이 문학에서 주제·방법·전위성 따위를 논하지만 사실 문학은 그들과 무관합니다. 우리는 텍스트 신체를 읽습니다. 텍스트를 신체적으로 읽을 따름입니다. 좋은 텍스트를 읽으면 병이 낫습니다. 그런 힘이 문학에 있습니다.......뇌가 지어내는 이야기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곳까지 자기 울림을 가닿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수준이 확실히 존재합니다.(102)

 


우리가 가왕이라고 부르는 조용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온힘을 쏟아 부어 노래해야 감동 일어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70% 정도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100%는 듣는 사람 공간을 없애버리므로 도리어 억압으로 작용한다.” 과연 조용필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소음이 된다. 소음은 입자다. 입자는 신체와 신체를 관통해 흐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 입자를 녹여내 파동, 그러니까 무명성에 도달해야 고요한 울림이 일어난다. 무명은 익명이 아니다; 모두를 공명共鳴으로 잇는, 모두의 이름이다. 무명은 그러므로 무한無限명이다. 무한명이어서 간주관적 몸 안으로 배어든다. 마침내 공동체 전체에 스며드는 무한명인 말은 강하다. ‘강하다강력하다가 아니다; ‘강인하다. ‘강인하다는 섬세함을 경계로 강력하다와 갈라선다. 섬세함은 소통, 그러니까 커다란 언어 신체를 만드는 데 필수다. ‘커다랗다는 외적·양적으로 거대한 상태가 아니다; 네트워킹이 내적·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다.

 

네트워킹이 내적·질적으로 풍요롭다를 전통적 언어로 표현하면 ()이다. () 상태로 우리를 매혹하고 이끌어가는 주문이 바로 말이다. 말다운 말은 치유 능력이 있다. 치유하는 말을 우리는 문학이라 이름 한다. 문학은 오늘 날 그 본성에 충실한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했다. “비평가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인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학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 그가 온갖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거대한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떤 거인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것은 총체성이라는 거인일 것이다. 그러나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디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 이것은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총체성이라는 거인이 연상케 하는 수평적 포괄의 뉘앙스 대신 바이러스로서의 문학이 관여하는 수직적 예리가 또 다른 총체성에 가 닿을 수는 없는 것일까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그러나 그 총체성은 이제 망원경이 아니라 내시경에 가까울 것이다. 전망이 아니라 심연을 보여줄 것이다.”(몰락의 에티카17) 그 다음 쪽에서 그는 이를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 말했다.

 

그야말로 똑 부러지게 깔끔하고 예리한 말이다. 심지어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는 말은 찰나적 취기를 부르는 표현이다. 사실은 그래서 이 취기가 뇌 현상이다. 당연히 내게 이 말은 신체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위 글 전체,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텍스트 신체는 다만 비유가 아니다; 실재다. 신체라면 비대칭대칭 역설이 구동되고 있어야 한다.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것 아니니까 저것이다, 라는 말이므로 형식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무슨 심오한 비밀이 숨어 있어서가 아니라 딱 질문 하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거인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다른 버전: “바이러스와 바이러스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이 질문을 하지 못한 까닭은 우치다 타츠루 식으로 표현하면 복잡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수줍음이 문학평론가에게 가당키나 한가.

 

접어준다. 그러고 나서 톺아보자. 우선, 깊이 문제. 거인과 바이러스를 대비할 때, 왜 넓이와 깊이를 마주 세울까? 신형철 자신이 말했듯 바이러스는 거인에 대해 협소한존재로 등장하지 않았나? 협소에서 깊이로 바로 넘어가는 이치적 논리적 근거가 없다.

 

다시 접어준다. 깊이를 문학에 넘겨주면 문학이 과연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대체 깊이란 무엇일까? 신형철은 수직적 예리란 표현을 쓴다. 예리와 깊이가 같은 말이라면 모르되 어떻게 예리가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또 다시 접어준다. 예리로써 드러낼 깊이란 과연 실재인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수직적 깊이는 수평적 넓이의 은유다. 은유일 뿐이므로 실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깊은 곳은 피부다.”(_발레리)라는 말이야말로 진리다. 깊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디 대비대로 작게, 세밀하게로 갈 수밖에 없다. 내시경이 아니라 현미경이다. 광학 너머 전자현미경이 밝히는 세계 진실은 비대칭대칭 네트워킹이다. 비대칭대칭 네트워킹에서 치유가 나온다. 문학이 비대칭대칭 네트워킹 진리에 가 닿지 못한 채, 넓이가 아니고 깊이라면서 파편의 총체성 운운하는 일은 가소롭다. 파편의 총체성은 없다. 작아서가 아니라 작아야 일으키는 네트워킹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인을 부정한다고 해서 바로 파편 바이러스로 달려가는 일은 거대유일신을 부정한답시고 무신론으로 달려가는 일과 같은 본성을 지닌다. 소미 존재 간 무한 네트워킹, 그러니까 참으로 큰 파동운동이 가짜 거대구조를 부수는 치유다. 이 진리를 모른다면 문학은 그 이름을 반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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