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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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중국 한나라 건국공신)이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황석공(강태공 병법 전수자)을 만납니다. 말을 타고 있던 황석공이 갑자기 왼쪽 신발을 툭 떨어뜨리고는 장량더러 주워서 신기라고 합니다. 장량은 그 신발을 주워서 신겼습니다. 며칠 뒤 장량은 또 말을 타고 지나가는 황석공을 길에서 마주칩니다. 그러자 황석공은 이번엔 양쪽 신발을 다 툭툭 떨어뜨리고는 주워서 신기라고 합니다. 다시 그 신발들을 주워서 신기는 순간 장량은 의문이 풀리면서 병법 오의에 가 닿습니다. 이 이야기 핵심은 아주 유사한 상황이 두 번 반복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번에 걸친 반복이 관건입니다.(61~63, 3쪽에 걸쳐 상세히 펼쳐진 <황석공과 장량 이야기>를 요약 인용함.)

 

이야기를 정확히 읽으면 황석공의 퍼포먼스는 반복과 차이 두 축으로 구성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중 반복을 중시한다. 차이를 아주 유사하다고 표현할 만큼. 내 생각은 다르다. 둘은 같은 무게를 지닌다. 반복이 중요하지만 차이 없는 반복은 습관에 매몰된다. 거꾸로 반복이 없다면 차이는 분방奔放에 지나지 않는다. 판박이 습관이나 어지러운 분방은 제자로 하여금 물음을 세우도록 하지 못한다. 포개지면서도 쪼개지는 역설 묘리를 찰나적으로 관통하게 해야 의문과 각성이 한 맥락 안에서 통합되어 일어난다. 이 역설은 병법 너머 세계를 구성하고 구동하는 이치다; 비대칭대칭 진리다.

 

포개짐은 항성恒性, 곧 상수다. 상수는 구조다. 전쟁은 물론 개인적 삶, 사회, 세계는 모두 고유한 구성체다. 그 구성체 원리와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승리, 행복, 정의, 평화공존의 터를 닦을 수 있다. 쪼개짐은 변성, 곧 변수다. 전쟁은 물론 개인적 삶, 사회, 세계는 모두 뒤엉킨 상호작용으로서 시시각각 움직인다. 무엇이 그때그때 변수로 작동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승리, 행복, 정의, 평화공존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친 병법 오의는 내용 아닌 전달 방식”(62), 곧 신체 자체였다.

 

내용을 말로 알아서는, 그러니까 두뇌로 알아서는 오의에 이르지 못한다. 통속한 제자 대부분이 그런 비법을 바라지만 없기도 하거니와 있다 해도 비법이라 할 것이 못된다. 문자에 갇히는 순간 역설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언어적 의미에 집착하는 한 청년에게 말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걸으라 했다. 그랬더니 그는 걸으면서 걸음이 지니는 의미와 목적을 줄기차게 생각했다. 그 사실을 지적하자 도리어 깜짝 놀랐다.

 

황석공과 장량 설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황석공이 장량에게 오의를 전수했다는 증거로 두루마리를 건넸는데 나중에 펴보니 백지더라.” 귀에 익은 전승이다. 그럼에도 제자는 황금글씨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스승은 그런 두루마리 줄 생각이 없다. 제자가 직접 쓰기 시작하자 스승은 홀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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