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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재(봉천고개) 마루 겨울은 칼바람으로 스산하다. 버스 정류장 뒤쪽 콘크리트 옹벽 밑 좁은 공간에 가꾼 듯 버려진 회양목이며 개맥문동이 매연과 소음 속에서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을 나고 있다. 한 모퉁이에 온 몸 오그라진 망초 모습은 더없이 가엾다. 그윽이 저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이야기 한 토막 떠오른다.
30년 가까운 옥살이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에게 누가 물었다. “그 긴 세월을 어찌 견디셨습니까?” 그가 답했다. “견디지 않고 준비했습니다.”
엄마가 사실상 거의 전혀 없었던 미성년 시절 나를 키워낸 할머니께서는 공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셨다. 당신 이름 석 자를 겨우 그리셨다(!). 오로지 생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질박한 이야기를 내게 많이 남기셨다. 그 이야기는 다만 소담한 에피소드거나 새길 만한 금언 정도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지 40년이 다된 오늘 돌이켜보니 그 이야기는 내 삶을 짜온 얼개 매듭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
“너무나 가난해 땟거리가 없어도 새벽 같이 일어나 샘으로 간다. 동이 가득 물을 담는다. 몇 번이나 이고와 커다란 가마솥 가득 붓는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굴뚝 따라 연기가 피어오른다. 굶어도 부엌을 데워야 부뚜막신이 복을 부르시는 법이다.”
다만 견디지 않고 준비하며 가난을 통과하신 지혜다. 나 또한 가난하게 살면서 할머니 영을 따랐다. 곧 있으면 일흔 줄에 드는데 다섯 시 경 일어나, 여섯 시 경 집을 나서, 일곱 시 반 경 한의원 문을 연다. 불을 밝히고 온열찜통을 데우고 전자진료부를 열어 환자 맞을 준비를 한다. 코로나가 이 겨울 나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지만 나는 다만 견디지 않는다. 봄을 준비한다, 저 살피재 마루 푸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