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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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합치면서 곰팡이는 부분적 광합성공생체가 되고 광합성공생체는 부분적 곰팡이가 된다. 그러나 지의류는 곰팡이와도 광합성공생체와도 비슷하지 않다.......창발 현상, 즉 개체 합 이상이 된다.(150)

 

지의류는 유기체가 생태계로 녹아들고 생태계가 유기체로 굳어가는 자리다. 그러면서 전체부분의 합사이를 흔들리며 오간다. 그 두 가능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일은 혼란스러운 경험이다.......지의류는 각 개체 합이라기보다는 그 개체 사이 교환이다. 지의류는 안정적 관계의 네트워크이면서도 지의류 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명사일 뿐만 아니라 동사이기도 하다.(158~159)

 

지의류보다 지구 생명체 특징을 더 잘 요약한 생물학적 시스템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의류는 광합성 유기체와 비 광합성 유기체를 모두 포함하는 아주 작은 생물권이고, 따라서 지구 주요 대사과정을 결합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의류는 미세행성, 극소형으로 축소된 세계다.(151)


 

지의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고 수분을 공급하는 균류(곰팡이무리)와 광합성으로 양분을 균류에 공급하는 조류(말무리)가 공생하는 유기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 너머에는 창발 현상, 즉 개체 합 이상” “개체 사이 교환” “명사일 뿐만 아니라 동사같은 명시적 의미 다발에서 생물권” “행성” “세계같은 암시적 의미 다발까지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다.

 

지의류는 그 정체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는 과정실재다. ‘창발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고, ‘개체 합 이상은 분석으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고, ‘교환은 복잡한 쌍무관계라는 말이고, ‘동사는 늘 진행 중이라는 말이다. 이 난관들이 얽히고설킨 생물권 행성 세계인 지의류보다 지구 생명체 특징을 더 잘 요약한 생물학적 시스템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 “정해진 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162)이라 한 표현을 보니 헌법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인간의 존엄에 관해 누군가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묘사할 수는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정의는 존재론이고 묘사는 윤리학이다. 존재론은 원리 문제고 윤리학은 참여 문제다. 오늘 우리가 식물을 공부하고 연장선에서 바이러스, 세균, 조류, 균류, 그리고 여기 지의류를 숙의하는 까닭은 자본인류가 사물화한 이들 실재를 직시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는 문명행진을 멈출 새로운 윤리를 세우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지의류가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경이로운 풍경을 펼쳐내는 예찬이 아니다; 사물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역시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전언을 듣지 못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완전한 번역을 유보한 채 지의류 생명 몸결 속으로 들어가 겸허히 참여하는 일이다.

 

겸허히 참여하는 자는 문제의식을 계속 유지한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공생이 위기로 내몰리는 한, 언제든 같은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물과 사자死者도 없고 완결된 해원과 애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의류는 우리에게 거의 불멸선사船師. 무엇이 목숨인지 무엇이 삶인지 무엇이 죽음인지 천 결 만 겹으로 웅얼거린다. 귀를 베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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