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쓴 지 오래됐다. 고도근시와 난시가 결합한 저질시력이라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나머지 네 감각이 모두 둔해지는 느낌 때문에 그 동안 안경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살아왔다. 예컨대 자다 전화를 받게 될 경우 안경을 찾아 쓰는 이유가 잘 들리지 않는 듯해서다. 사실 이치를 따르자면 오감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므로 마냥 느낌 문제만은 아닐 터. 50여 년 간 안경은 가히 절대지배자였다.



그 안경, 정확히는 안경테가 며칠 전에 부러졌다. 당혹감이랄까 아득함이랄까 이 감정을 안경 오래 써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다. 하여 열일 제쳐놓고 안경점으로 달려가게 되는 심사도 말이다. 주말에 단골 안경점에 가기로 하고 우선 전에 쓰던 안경을 찾아 써보았다. 눈에 맞지 않아 불편했다. 무심코 벗어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어느 순간 쑥 하고 질문 하나가 솟아오른다. “왜 모든 대상을 꼭 선명하게 봐야 하지?”

 

꼭 선명하게 봐야 할 것과 대충 봐도 괜찮을 것을 구별하지 않아온 사실이 갑자기 어떤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날아든다. 상담치료 하러 온 아픈 한 사람 얼굴은 선명하게 봐야 하지만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여러 사람 얼굴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거리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면식조차 없는 행인을 일일이 이목구비 확인하며 걸을 이유가 없다. 나는 안경을 벗고 맨 눈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경 통해 바라봤던 세상을 50여 년 만에 거둬버린 요즘 눈앞에는 가히 예술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끌로드 모네가 말년에 시력을 잃어가며 그린 그림처럼 뿌연 모습의 사람들과 사물들이 무연히 평화롭게 흘러간다. 자연스럽게 나는 비-중심시각을 지니게 된다. 안 보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안 보이는 만큼 인연 아니라는 태평으로 변해간다. 안경 지배를 철하고 맨 눈으로 보는 이 행위, 가히 시선視禪이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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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9-25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스크 쓰기 시작하면서 안경 벗었습니다.
좋더군요. 눈에 뵈는 게 없으니. ^^

bari_che 2021-09-26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무인^^ 세상 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