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객관적 실재로서 시간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중요할 따름이다.......

  과거, 또 상상된 미래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찰나에 포착되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졌다면 어디론가 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는 일에 그 시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지개를 켜고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귀 기울인다.(434)

 

  빗소리를 들으면 시간이 사라진다.......우리는 시간을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듯,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바같이 그냥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찰나들만 있을 뿐.(439)

 

 

송이 송이 눈송이 눈

아주 늙은 영험한 노파들

 

비 오신다 비님 비님

지상의 모든 물방울은 삼십억 년 이상 나이 먹었지

 

오늘 내가 마신 물 한 잔

하늘땅 그득한 이야기들

 

김선우 제6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에 실린 <, , 그래서 물 한 잔> 전문이다. 시인은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이고 번진다고 노래한다. 삼십억 년 이상 늙어 영험해진 시간은 하늘땅에 그득한 이야기가 되어 오늘 내가 마신 물 한 잔으로 도란거린다고 노래한다.

 

시간은 객관적 실재로 사물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객관적 실재를 구성해가는 과정 사건이다. 사건이 사물이 아닌 까닭은 아날로그적 전모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적 분절의 무한한 변모가 찰나마다 새로이 일어나서 사건을 이룬다. 찰나마다 새로이 일어나는 변모에 주의하면 통속한 시간은 허구로 드러난다.

 

허구 시간에 올라탄 인간 영혼은 주야장천 과거 아니면 미래로 떠난다. 이제 여기 살고 있는 삶에서 영혼을 빼돌려 병적인 내면자아를 소유한다. 병적인 내면자아 치유하고 참 나 찾는다는 온갖 술법을 만들어서 악순환에 빠진다. 악순환 고리를 끊는 길은 오늘 내가 마신 물 한 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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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20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첫 문장 읽고, ‘나 bari_che님을 오프에서 꼭 뵙고 싶다‘ 했는데 바로 아래 434쪽 인용하셨다고 적어주셨네요. 이런 세계관을 보여주셔서 서재에서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멋지세요!

bari_che 2021-08-20 16:35   좋아요 1 | URL
백만 년만에 멋지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멋지게 늙어가는구나 싶어서 기분만이라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